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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쉬키-쁠로쉬키, 콘템포카페 - 느긋한 시작의 행복 아침 10시는 되서 눈을 뜬 것 같다. 2019년 9월 2일, 한국을 떠나온지 나흘 째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오늘도 맑았다. 술이라고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 몇 캔이 전부라 취한 것도 아니지만, 어제의 루스키 섬 경험은 많은 피로를 가져다 주었다. 동행한 친구들도 일어나긴 했지만 도저히 이불 밖으로 나올 엄두는 내지 못했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종아리가 저렸다. 이럴 때는 넷플릭스다. 10시부터 1시가 될 즈음까지 우리는 넷플릭스로 애니메이션을 봤다.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러시아의 동쪽 끝자락에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 얼마나 여유로운지. 여행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다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진귀한 여유였다. 어제도 그렇게 돌아다녔으면서, 애니메이션을 두세 편 보고 나니 좀이 쑤셨다. 정.. 더보기
3. 그림에도 시간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아직 내 키가 어머니의 반밖에 안되던 시절, 어머니가 홍유릉으로 내 손을 붙잡고 나가셨다. 스케치북과 손보다 큰 지우개, 날카롭게 촉을 세운 4B연필과 함께. 아무거나 그리기 쉽고, 그리기 쉬운 걸 그려보렴. 나는 이름 모를 기둥을 한참 그렸다. 그리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오랜 시간 나는 그 기둥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림과 마주했다. 나는 금세 한 반에 한 두 명 정도 있는 그림쟁이가 되었다. 그림은 시간을 많이 쓸 수 있었다. 수업을 듣는 시간보다 연필촉에 신경을 쓰는 시간이 많았다. 그런다고 시끄럽다고 지적을 받는 것도 아니었으고, 오히려 누구도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 점이 오히려 좋았다.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고 나와 종이만 있는 시간이 좋았다. 어느 순간.. 더보기
2. 음악이 하고 싶었다. 음악이 하고 싶었다. 지휘도 하고 싶었고,작곡도 하고 싶었다. 어떤 때는 락스타도 되고 싶었고첼리스트가 싶은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지휘자였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지휘자는 아니지만 지휘봉을 흔들 때마다 따라 흔들리는 곱슬머리가 누구보다 멋있는 정열 넘치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지휘자였다. 말을 떼기도 전부터 클래식을 들었고, 지휘를 따라 했다. 음악을 하는 게 당연했다.다섯 살 안된 손에는 바이올린을 쥔 때부터 한참. 당연히 음악을 할 줄 알았다. 그때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면 어정쩡한 지금의 삶이 없었을까? 하지만 나는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말았다.피아노도, 첼로도, 클라리넷도.드럼도, 기타도, 작곡도. 그나마 글을 쓰면서 지금껏 조금씩 남기는 가사와.태어났기에 평생 가질 수밖에 없는 노래만 .. 더보기
1. 살아보니 어정쩡한 인간이 되어버린 나를 위해 “그래도 우리 아인씨 부모님은 좋겠어. 이렇게 번듯하게 잘 큰 아들을 두었으니.” “그래도, 너 정도면 우리 또래 중에는 잘하고 있는 중이잖아, 요즘 얼마나 힘든데.” 맞는 말이다. 요즘 같이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힘든 젊은 이들의 시대에 작은 회사긴 해도 좋은 대우를 받는 회사를 찾았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크게 비호감을 살만한 성격은 가지지는 않았다. 맞는 말이다. 어떻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살다 보니 나쁘지 않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어정쩡하다. 그렇게 괜찮은 사람, 당장 입에 풀칠할 정도로 벌어먹을 수 있는 사람. 어디 가도 크게 적은 만들지 않는 사람이 되었더니. 남들이 보기에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지만, 어느 곳에도 제대로 속할 수 없는 어정쩡한 사람이 되었다. 취미도, 특기도 더 .. 더보기
국립 연해주 박물관, 벨기에펍 - 유럽 속 익숙한 과거와 만나다. 러시아가 버거의 종주국임을 다시 느낀 점심이 지나고, 오전과 다른 여행을 하기 위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 거리로 나섰다. 국립 연해주 박물관과 미술관이 목적지다. 이 작은 도시에 국립 박물관과 국립 미술관이 둘 다 있다니. 여행을 가면 거리와 스케줄로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못들리는 것이 가장 아쉬운 내게는 더할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눈이 부시게 좋은 날씨가 우리를 유혹했다. 유럽 거리를 이렇게 맑은 날씨에 거늴 수 있다는 것 또한 행운이다. 하지만 이 날 오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오전, 러시아의 따가운 햇살은 루스키 섬에서 맛볼 만큼 맛봤다. 러시아의 맑은 하늘 아래 따가운 햇살보다는 러시아의 에어컨 공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경로 상 가까운 국립연해주미술관부터 들렀지만 오늘은 뭔가 원하는 대로는 안.. 더보기
루스키 섬, 댑버거 - 예상 밖의 일도 있는 법이지 느긋하게 맞는 월요일 아침. 월요일을 끼고 여행을 할 때 좋은 점은 모두가 출근할 때, 느긋한 오전을 맞는다는 것이다. 오늘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는 조금 떨어진 루스키 섬으로 자전거 트래킹이 예정되어 있다. 어제 여행한 거리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거의 한 바퀴 이상 돌았다.) 힘을 비축하고 조금 느긋하게 출발하기로 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 1주일을 보내는 이유가 이런 느긋함을 위해서니. 하는 김에 넷플릭스로 다시 재미있게 봤던 애니메이션을 일행에게 소개할 겸 재탕을 시작했다. (결국 그 애니는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중 48화를 전부 보고 말았다. 단연 재미있었던 추억 중 하나다.) 루스키 섬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남단의 거대한 섬이다. 당연하게도,.. 더보기
독수리전망대 - 하염없이 바라보다 배고프다. 배가 고플만도 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종횡으로 누비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너머로 지고 있었다. 여행을 가게 되면 꼭 먹어보겠다는 리스트는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의 경우는 '샤슬릭'이었다. 러시아의 음식은 아니지만, 가장 흔하고 맛있게 만드는 요리인 만큼, 꼭 러시아에서 먹어보고 싶었다. 구글에서 가장 평가가 괜찮은 식당을 찾았다. 영어를 잘 못한다고 되어있었지만, 다 그러니까 여행 아닐까. 무엇보다 너무 지쳤다. 다른 곳을 찾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얼른 먹자. 샤슬릭을. 이왕 샤슬릭이라면, 양으로 만든 샤슬릭이 좋다. 누가 약속한 것도 아니지만 식당에 앉은 우리는 그렇게 정했다. 돼지나 소에 비하면 요리로 먹은 일이 없어서 그럴까. 특별한 한 끼를 하게 된다면, 양이 특별함을 배.. 더보기
요새박물관 - 최전방이었던 요새에서 포크롭스키 주교좌 성당에서 내려와 해변을 끼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고 있자니 바닷바람이 따갑다. 햇빛이 바람에 비쳐서 따가운 건지, 철썩이며 솟는 바다의 소금기가 내 뺨에 붙는건지 모르겠지만, 그 따가움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언제고 이런 따가움을 느끼며 산책을 하고 싶었다. 언덕을 조금 내려오면 언제봐도 평화로운 해양공원이 눈에 보인다. 해양공원을 조금 거닐다 보면 언덕 위로 이어지는 크지 않은 계단이 있다. 있는 것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겠다는 듯, 조용하게 그 자리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요새박물관이 나온다. 꽤 유명한 관광지지만 많은 사람이 오가지는 않고 있었다. 마치 아직도 요새로서의 기능을 하는 듯 고요했다. 요새박물관의 입장료는 200루블이다 . (3300원 가량) 박물관이라고 해도 정돈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