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롭스키 주교좌 성당에서 내려와 해변을 끼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고 있자니 바닷바람이 따갑다.
햇빛이 바람에 비쳐서 따가운 건지, 철썩이며 솟는 바다의 소금기가 내 뺨에 붙는건지 모르겠지만,
그 따가움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언제고 이런 따가움을 느끼며 산책을 하고 싶었다.
언덕을 조금 내려오면 언제봐도 평화로운 해양공원이 눈에 보인다.
해양공원을 조금 거닐다 보면 언덕 위로 이어지는 크지 않은 계단이 있다.
있는 것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겠다는 듯, 조용하게 그 자리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요새박물관이 나온다.
꽤 유명한 관광지지만 많은 사람이 오가지는 않고 있었다. 마치 아직도 요새로서의 기능을 하는 듯 고요했다.
요새박물관의 입장료는 200루블이다 . (3300원 가량)
박물관이라고 해도 정돈된 전시는 없었고, 원래 이 요새에서 썼던 것 그대로인 듯 전시되어 있었다.
설명 하나 없이 포와 미사일, 각종 무기들이 요새 이곳 저곳 그득하기 늘어져 있었다.
만지고 올라타고 기대는데도 아무런 제지도 없었다. 그냥 관리하는 이가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어쩌면 관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닌 이곳의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베지미안나야(Bezymyannaya)'라는 이름의 요새로 만들어진 이 작은 요새는
러일전쟁을 지내며 재건축되며 오랜 시간 러시아의 극동을 지켜왔다.
그 사이 소련은 붕괴되었고, 이 작은 요새도 다른 수많은 러시아의 요새들처럼 임무를 끝냈다.
운이 좋게도 블라디보스토크 한켠에 자리 잡은 이 요새는 제국의 황혼부터 대전의 화마까지 모두 간직하고
탄약 냄새 나는 군인대신 러시아 햄버거 냄새를 뭍힌 손님들을 맞게 되었다.
요새박물관은 이전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멈춰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어떤 설명도, 어떤 잘보이려 하는 몸단장도 없었다.
'요새는 이렇게 운영되었다' 라는 사실만을 알려주고 있었다.
상상외로 그 모습이 훨씬 현장감을 느끼게 해 이 곳만 대전이나 냉전이 끝나지 않는 듯 한 기묘함도 느꼈다.
총포앞에 앉고, 요새 위를 뛰어다니며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도
왜인지 연신 군인들의 분주한 군화발 소리가 낡은 요새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 했다.
당장이라도 작전을 할 수 있을 듯한 요새의 밖과는 다르게 그래도 요새 안은 '조금은' 박물관스러웠다.
러시아에서 이용되었던 온갖 무기와, 장병들이 썼던 생활용품 등이 유리장과 벽에 전시되어있었다.
다른점이 있다면 시대별로 정리했다던가 주제별로 관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최대한 많이 들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많은 양만큼이나 단순히 무기가 아닌 장병들의 생활에 관련된 전시품이 많다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영어 설명이나 가이드 하나 없었지만, 이런 점이 전시를 몰입해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러시아식으로 개량된 성모자상, 메모가 잔뜩 되어 있는 지도, 전보를 치던 손때묻은 타자기. 포구를 닦던 솔.
러시아 군인들의 삶을 그대로 간직한 군용품들을 보고 있자니 남같지 않은 감정이 생겼다.
한창 바쁘던 장교생활 중에 간 여행이라 그럴까, 그저 여행 중의 박물관이라 더 감성적으로 물들어서 그럴까.
어떤 이유던, 국토 최전방에서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 요새를 보며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세계대전도, 냉전도 없다. 부동항을 찾기위해, 일본의 진격을 막기 위해 요새가 필요하지 않다.
어딘가는 여전히 국방을 지키는 요새들이 러시아에도 있겠지만, 많은 요새들이 이 요새박물관처럼 멈췄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언제 이런 요새를 가지게 될까. 언젠가의 희망을 가지며 요새 위에 잠시 앉아 시간을 보냈다.
해가 눈부시게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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