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 아마 내 기억에서는 처음으로 아버지와 같이 극장에 가서 본 영화다. 참 잘 만든 영화였다. 하지만 1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영화의 디테일, 감동, 스토리보다 내 마음에 남아있는 건, 결말에서 형의 유골을 안고 보는 동생의 절규와 그 장면을 아버지와 같이 보러 갔었다는 사실이다. 자식에게 부모와 같이 본 영화와 그 영화에서 나오는 인물은 마음 한 복판에 지울 수 없게 새겨지게 된다.
2000년 개봉한 첫 엑스맨은 극장이었든, DVD나 테이프였든 많은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영화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서 본 영화는 슈퍼맨 같은 전형적인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돌연변이지만 하나의 사람인 등장인물들과 주인공 ‘울버린’은 아이들을 매혹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총칼에 맞은 어떤 상처도 금세 회복하고선 사람들을 해치려는 적을 향해 달려드는 그 모습은 다른 초능력을 가진 영웅들과는 다르게 너무 실감나는 영웅이었다. 아버지와 같이 가서 본 엑스맨과 울버린은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 속에 깊게 새겨졌다.
그 후로 17년이 지났다. 엑스맨이 처음 개봉했을 때 초등학생,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사회인이 되었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되었다. 그 세월의 흐름 가운데서도 계속 엑스맨 시리즈에서 그들의 울버린은 휴 잭맨이었고, 휴 잭맨은 울버린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영원할 것 같은 울버린을 늙게 만들었다. 한동안은 우리가 알던 휴 잭맨은 늙어가면서도 언제나 젊을 것처럼 울버린을 연기했다. 올해 휴 잭맨은 우리 나이로 50세가 되었다. 언제나 다치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울버린을 계속 연기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가 울버린을 연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어떻게 끝날지 두려워하면서 한 켠 기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의 아이들 앞에 ‘로건’이 개봉했다. 울버린은 오히려 지금의 휴 잭맨의 나이보다도 10살은 더 늙어 보였고, 총에 벌집이 되어도 금새 다시 일어나던 그는 불량배들의 발길질에 쓰러져 신음하고 그들의 총에 맞고 한참을 신음한다. 더 이상 낫지 않는 상처가 가득한 그의 등은, 그 당시의 아이들이 걱정하던 ‘휴 잭맨이 늙어서 울버린을 연기하지 못한다’라는 생각을 ‘울버린이 늙어서 더 이상 움직이기도 힘들다’라는 눈 앞에 닥친 현실로 만들었다. 이제 아이들은 그가 다치지 않고 행복하기만을 원한다. 그들의 영웅이 죽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니까.
그런데도 울버린은 움직인다. 몇 번을 다치고 또 다쳐서 제 몸뚱이를 끌기도 힘든 그가 움직이는 이유는 이전처럼 세상의 멸망을 막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자비에 교수와, 예상치도 못했던 하나뿐인 딸, ‘로라’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어찌 보면 사소하면서 가장 숭고한 그 목적에 아이들은 ‘영웅’ 울버린의 얼굴에서 ‘가장’ 로건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로건에게서 가장 로건과 닮은 자신들의 아버지를 보게 된다. 처음 그들과 같이 엑스맨을 본, 아이들의 손을 끌고 극장을 향하던 아버지가 ‘울버린’의 모습 위에 영화 내내 겹쳐 지나간다.
이제 아버지는 로건만큼 나이가 들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세상에서 참 멋진 일을 하는 것으로만 보이던 아이들의 눈앞에 17년이 지난 아버지는 예전만큼 쌩쌩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예전 같았으면 별 거 아니라며 털고 일어날 병에도 오랫동안 앓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아버지가 쉬지 않는 이유는 가족이 맘 편히 지내기 위해서라는 이유 때문이다.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아직 아버지는 울버린이지만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아버지는 한 사람의 로건이다. 이제는 로라가 로건을 돕듯이, 아이들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영화를 봐야 하고, 도울 때가 왔다. 그리고 언젠가 있을 이별을 준비해야 할 시간도 오고 있다. 17년이 지났으니까.
그런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걱정했던 울버린과의 이별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아련하고 아름답게 끝났다. 그는 가족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 가족을 지켰다는 것에 기쁘게 눈을 감았고, 로라는 다시 자신의 가족과도 같은 이들을 이끌고 길을 떠났다. 이제 휴 잭맨이 울버린으로 다시 출연할 일은 없겠지만, 아이들의 마음 한복판에 새겨진 울버린은 여전히 휴 잭맨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제 누군가의 부모라는 호칭이 더 가까운 아이들은 이제 딸 로라에게도 울버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울버린의 일대기의 끝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2000년의 그 아이들이 마냥 슬프지 않은 것은 그들 자신이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몇 번을 다쳐도 일어나는 울버린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닮은 또 다른 아버지가 되어 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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