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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사진첩/블라디보스토크 사진첩

루스키 섬, 댑버거 - 예상 밖의 일도 있는 법이지

느긋하게 맞는 월요일 아침. 월요일을 끼고 여행을 할 때 좋은 점은 모두가 출근할 때, 느긋한 오전을 맞는다는 것이다. 

오늘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와는 조금 떨어진 루스키 섬으로 자전거 트래킹이 예정되어 있다. 

어제 여행한 거리도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거의 한 바퀴 이상 돌았다.)

힘을 비축하고 조금 느긋하게 출발하기로 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 1주일을 보내는 이유가 이런 느긋함을 위해서니.

하는 김에 넷플릭스로 다시 재미있게 봤던 애니메이션을 일행에게 소개할 겸 재탕을 시작했다.

(결국 그 애니는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중 48화를 전부 보고 말았다. 단연 재미있었던 추억 중 하나다.)

루스키 섬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남단의 거대한 섬이다. 

당연하게도, 버스는 다니지 않는다.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러시아의 택시는 싼 편이었으니까.

러시아의 택시 애플리케이션 'gett'으로 택시를 불렀다. 

거의 15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인데도 택시 요금이 한화로 만원이 안 나오게 찍혔다. 

선불 택시 어플 중에는 비싼 편에 속하는 겟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교하면 놀랄 가격이었다. 

마중나온 택시로 졸로토이 대교를 지나 남으로.

택시는 도요타 계열의 소형 승용차였다. 우리나라 택시들이 반짝반짝 거리는 중형급의 승용차가 오는 것과 사뭇 달랐다.

막 집에서 나온 아주머니 같은 기사분이 살갑게 안내했다. 마치, 개인적으로 아는 분과 카풀로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말은 안 통해서 그렇게 즐거운 대화는 못 나눴지만, 충분히 편안하고 즐거운 대화였다.

(러시아 택시 사기는 유명한 편이다. 하지만 gett을 비롯한 메이저 어플로 오는 기사분들은 대개 안전하다고 알려졌다.)

졸로토이 대교와는 비교도 안되는 루스키 대교.

꽤 가깝겠지 했던 루스키섬은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 하긴 거의 15킬로미터다. 서울을 좌우로 가로지를 거리다.

그래도, 차는 적은 편이었고, 졸로토이 대교, 루스키 대교로 이어지는 웅장한 대교와, 맑은 바다내음이 지루함을 달랬다.

날씨가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편이었다. 분명 자전거 트래킹으로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될 것 같았다.

루스키 섬에 위치한 극동연방대학교, 이 날따라 경비가 삼엄했다.

우리의 계획은 완벽했다. 극동연방대학교에 있는 자전거 대여점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루스키섬 끝자락까지 기분 좋은 하이킹을 한 후 돌아오는 거였다. 차도 없고, 날씨도 좋았다. 자전거만 빌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극동대학교에는 경찰이 가득했다. 학생들도 모두 학생증을 확인하고 학교에 들어가고 있었다.

확인해보니 '극동 경제포럼'이라는 포럼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그 날부터 시작하는 포럼이었다.

남북한을 포함한 각 국의 경제 전문가들이 모두 이 극동연방대학교에 모이는 것이라 했다. 과연 그 이름만큼이나 삼엄한 분위기였다.

이 대학교의 학생들에게조차 검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이내 우리는 대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

대학교의 학생들조차 저 하나하나 검사하는데 머리 짧은 아시아인 셋이 더듬더듬 사전을 찾으며 경찰에 말을 건다니. 잘 될 리 없었다.

루스키섬에는 작은 연구소와 학교를 제외하면 수풀만이 우거졌다.

결국 남은 건 두 다리로 걷는 것뿐이었다. 

하이킹을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왕 온 루스키섬 입구에서 돌아가는 것은 많이 아쉬웠다.

섬 중반쯤 들어가면 다른 자전거 대여소도 있고, 일단은 무작정 차도를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한참을 걸어도 이 곳을 걸어가는 사람은 우리 일행 셋 뿐이었다. 

왠지 트랙에서 벗어난 느낌이라 낯선 고양감을 느꼈다. 

지면에 낮게 깔린 풀, 멀리 들리는 파도소리,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은은한 파란색 수평선. 

자전거로는 너무 금방 지나가 보지 못했을 법한 루스키섬의 속삭임이 보였다.

자전거를 못 빌렸다는 예상 밖의 당혹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우리는 루스키 섬에 빠져들었다.

자전거 하이킹을 하기에 너무 좋은 날씨다.

너무 완벽한 날씨였다. 따가운 블라디보스토크의 여름 햇살이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섬은 아름다웠다.

사실 꽤나 흥이 나는 시간이었다. 날씨만 받쳐줬다면 아마 햇살이 이끄는 대로 루스키 섬 일주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러시아답지 않게 너무 완벽한 여름 날씨였다는 점이다.

몇 시간이 지났을 까, 살짝 쌀쌀하던 러시아의 여름은 온데간데없었고, 도로는 발바닥을 구울 듯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가볍게 페달을 밟기 위해 신고 왔던 샌들 끈은 살갗을 긁어냈다. 예상 밖의 즐거운 하이킹은 끝났다.

즐겁지 않다면 예상 밖의 여행을 할 이유가 없었고, 우리는 그 길로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이미 1시는 아득히 지난 시간이었다.

그 유명한 '댑버거' 의 안락한 소파에 앉으니 비로소 땀이 말랐다.

늦은 점심을 먹을 식당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유명한 펍이라 할 수 있는 '댑 버거'였다.

첫날 저녁 본디 가려던 식당이기도 했었고, 마침 점심이 지난 시간이라 사람도 적어 예상과 다른 하이킹으로 지친 몸을 기대기 좋았다.

저녁 펍에서 맥주와 함께 버거를 먹기로 했었지만, 이미 하이킹부터 계획에서 벗어난 시점에 뭐 어쩌랴.

각자 자기 몫의 버거와 버펄로 윙, 감자튀김, 시저 샐러드를 시키고 더위를 피해있다는 점에서 만족했다.

댑버거의 메뉴판에는 거짓이 없다.

온갖 예상외의 일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있었고, 오늘 첫 계획부터가 예상외였지만, 가장 예상외였던 것은 너무 정직한 버거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다른 많은 식당들도 그랬지만, 댑 버거는 메뉴판의 모습을 그대로 담다 못해 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듯했다.

주체를 못 하고 번 밖으로 햄버거와 치즈, 소스들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이 버거가 550 루블(8800원). 예상을 뛰어넘었다.

예상 밖의 식사가 한 상. 결국 맛있엇다.

시켰던 모든 식사가 자리를 잡았고, 설탕도 안 묻은 콘플레이크로 아침을 때운 우리는 댑 버거의 강렬한 맛에 사로잡혔다.

예상 밖의 비주얼만큼이나 강렬하고 진한 맛을 모든 메뉴가 자랑했다.

역시 '버거의 종주국은 러시아가 아닌가'라는 얘기를 체푸카 버거나야에 이어 다시 잔을 들며 얘기했다. 

이번엔 순수한 우스갯소리가 아닌 살짝은 진심이 담겨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월요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자전거가 아닌 발로 걷기 시작한 여행은 저녁거리를 점심에 먹으면서 즐거움을 되찾고 있었다.

예상 밖의 일이 있으면 어떤가. 그 순간에서 밖에 못 느끼는 일이라면, 일단 즐기면 된다.

힘들어지면 그때 다른 일로 넘어가면 된다. 또 즐거워질 거다. 여행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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