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버거의 종주국임을 다시 느낀 점심이 지나고, 오전과 다른 여행을 하기 위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 거리로 나섰다.
국립 연해주 박물관과 미술관이 목적지다. 이 작은 도시에 국립 박물관과 국립 미술관이 둘 다 있다니.
여행을 가면 거리와 스케줄로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못들리는 것이 가장 아쉬운 내게는 더할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눈이 부시게 좋은 날씨가 우리를 유혹했다. 유럽 거리를 이렇게 맑은 날씨에 거늴 수 있다는 것 또한 행운이다.
하지만 이 날 오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오전, 러시아의 따가운 햇살은 루스키 섬에서 맛볼 만큼 맛봤다.
러시아의 맑은 하늘 아래 따가운 햇살보다는 러시아의 에어컨 공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경로 상 가까운 국립연해주미술관부터 들렀지만 오늘은 뭔가 원하는 대로는 안되려는 모양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술관은 문을 닫았다. 문을 닫을 시간은 아닌데, 월요일이니 폐관인 날일 지도 모르겠다.
아쉽지만 아직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날은 3일은 남았다.
있는 대로 그 주변에 있던 미술관을 한 군데 더 잡아 가보기로 했다. 여러 미술품을 통해 힐링이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왠걸. 찾아간 현대 미술관의 문도 굳게 닫혀있었다. 불운도 계속 되면 필연 같아지는데. 박물관도 닫혀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운수에 대한 묘한 불안감을 가지고 국립 연해주 박물관은 열었길 빌었다.
천만다행으로 국립연해주박물관은 문을 열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의 스케줄이라고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다. 댑버거도 저녁에 먹을 에정이었고.
'그럴 수도 있지'로 넘어가기엔 조금 너무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아마 국립연해주박물관마저 문을 닫았다면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여행이 그래도 조금은 자리잡힌 여행다워졌다.
'발해왕국의 자취를 따라서'.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지만 정작 우리는 보기 힘든 역사의 유물들이 박물관 1층에 가득했다.
사실 큰 경이로움을 가질 유물이 있지는 않았다.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는 익숙한 발해양식의 장식물.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무엇보다 낯설게 와닿았다.
이 곳에 잔뜩 세워진 석조건물이 있기도 아득히 이전의 시기, 우리와 닮은 얼굴을 한 이들이 이 곳에서 생활을 했다는 것이 문득 와닿았다.
굳이 우리의 조상들이 요동을 자랑스럽게 내달렸다던가 그런 민족적인 감상은 아니다.
발해 사람들이 이 곳에 살았었다는 것, 겨우 비행기 2시간 거리에.
그 사실이 나를 신화 속 용의 비늘 조각을 손에 얻은 아이처럼 흥분하게 만들었다.
전혀 멀지 않은 곳에 그들이 살았었다. 그 사실을 눈 앞에서 보게 된 것만으로 충분한 전시였다.
2층에 올라오니 연해주에 살던 여러 민족의 여러 세상 이야기가 우리를 맞았다.
1층에서 본 발해와 마찬가지로, 이 곳의 전시품들도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보통 박물관하면 생각나는 과거가 선사하는 경이보다는 과거에 한쪽이 된 사람들도 단순한 인간이었음을 강조하는 구성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조차 잠시 잊고 있던 단순한 사실을 이 박물관은 상기시켰다.
따지고 보면 역사가 뭐 그리 어려운 것이겠는가. 국립 연해주 박물관이 보여주는 것처럼 역사는 지나갈 어제일 뿐이다.
우리는 그 수많은 어제의 이야기들로부터 잔잔한 향수와 옛 미에 대한 경이를 느끼고 나아갈 길의 힌트를 엿들을 뿐이다.
결국은 내 어제도, 지난 1년도, 이 여행도 역사가 되어가는 것이니, 역사란 사진첩을 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지루하고 어려운 암기과목이 아닌, 단지 먼 어제의 그들이 찍혀있는 사진첩임을 일상적인 유물들이 외치는 듯 했다.
3층은 러일전쟁과 2차세계대전 당시의 연해주를 간직하고 있었다.
연해주 거주민들에게 전쟁은 어떤 의미였을까. 3층 전체에 널부러진 듯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들과 깨진 스크린을 보니 어렴풋 알 것 같았다.
러시아의 최동단, 언제나 전쟁 준비를 강요당하던 이 작은 도시는 최전선으로 침략자를 수차례 마주쳐야만 했다.
강요받은 전쟁에 삶의 터전은 깨져나갔다. 이 도시에게 있어서 전쟁은 승패와 관계 없이 슬픈 기억으로 남았다.
브레드 피트를 떠올리게 하는 소련의 멋들어진 장교가 와도 이 도시에 찍힌 감정은 전쟁에 대한 피곤함뿐이었다.
국립 연해주박물관, 박물관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라도 시간이 된다면 한 번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작은 박물관에 들리길 바란다.
우리와 같은 얼굴을 한 발해인들부터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깨진 전시물까지,
연해주가 들려주고 싶은 보통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도시를 한 발짝 더 가까이 둘 수 있었다.
박물관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 듯 했다. 해는 아직 지지 않았지만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
보통 내 여행 방식은 가이드북과 지도를 교차하며 가장 후회없을 곳을 들르는 편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차피 그렇게 공들여 세운 계획대로 세운 것이 하나도 맞지 않는 날이었기 때문에, 내 감을 믿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눈에 띄는 한산하고 시원해보이는 펍으로 들어갔다. 이름도, 무엇을 파는지도 몰랐다.
일단은 각자가 좋아하는대로 흑맥주, 라거, 바이젠을 시켜 건배를 하고 시원하게 피로를 지워넘겼다.
이윽고 플래터로 구운 고기와 야채꼬치들이 나왔다. 가격이 얼마인지 어떤 메뉴를 시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것도 계획하지 않고 시켜버렸고, 어찌되던간 맥주와 고기, 야채 모두 맛있었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다른 기억들은 선명하지만 이 날의 저녁 기억만큼은 선명하지 않다. 하지만 계획 없이 흘러간 오늘도 역시 행복했다는 기억은 남아있다.
(이 글을 작성하며 구글의 도움을 받아 찾아본 펍은 '벨기에 펍'. 그래서 맥주가 맛있었나보다.)
집에 와 땀에 전 몸을 따끈하게 씻어 녹이고 어제와 같이 '미쉘 베이커리'에서 디저트와 맥주를 사서 마시며 오늘을 정리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미쉘 베이커리는 매일 같이 밤마다 들렸다.)
문득 숙소가 꽤 높은 곳에 위치했다는 생각이 들어 숙소 공용 발코니로 나가보았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찬란한 야경이 눈을 수놓았다. 오늘의 여행도 참 아름답다.
그리고 문득, 이 도시가 가깝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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