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자 (The Scarlet Letter) | ||
너세니얼 호손 지음 |
펭귄클래식 코리아 |
392p |
죄송하다, 법의 심판을 받겠다, 자숙하겠다. 국민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굳이 누구를 언급하지 않아도 일주일에 한 번은 뉴스를 통해 반복되는 이야기다. 마스크와 모자를 푹 눌러 쓴 이들은 그 이상의 말은 입에서 내지 않은 채 호송을 받으며 카메라 저 편으로 사라진다.그들은 '사과'와 '심판'을 얘기한다. 사건의 경과에 따라서도 마땅히 심판과 자숙이 뒤따른다. 심판. 자숙. 좋은말이다. 마땅히 과오가 있다면 치뤄야 하고 그것이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시킨다.
그러나 문득, 의문이 든다. 그들의 사과, 심판, 자숙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그들이 하고 있는 일련의 사과는 진정 의미가 있는가?
이 의문에 대해 고전 명작 하나가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주홍글자'. 현대에 들어 모든 과오에 대한 낙인이 '주홍글씨'라고 불리게 된 계기를 만든 작품이다. 너세니얼 호손의 로맨스 연작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 작품은 작가인 호손이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써내려가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한 여인이 심판 받고 있다. '헤스터 프린'이라 불리는 여인이다. 학자인 남편보다 먼저 미주로 이주를 해 살림을 차렸고, 남편이 몇날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자 불륜에 빠져 임신을 한 여성이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불륜을 저질렀고, 어떤 식으로, 누구와 저질렀는지는 알지 못한다. 작품의 시작은 그녀가 대중 앞에서 심판 당하는 순간 부터다.
그 당시 가혹한 청교도의 법률에 따라서는 본디 죽음을 면치 못했겠지만, 남편의 생사도 알지 못하고 오래동안 떨어져 있음이 참작되어 가슴 한 복판에 '간통'을 뜻하는 A를 수놓아 달게 되고 대중 앞에 그 불륜의 결과인 딸과 함께 서서 모욕을 당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이 것은 목숨을 앗아가지만 않을 뿐 사회적 죽음에 가까운 형벌이었다. 그녀가 형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 무거운 형벌을 조용히 받아들고 자신보다 상황이 안좋은 이들을 도우며 딸과 함께 속죄의 나날을 산다.
헤스터는 불륜의 상대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불륜이라는 죄가 오로지 자신이 사죄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라는 듯이. 이는 헤스터가 오롯이 대중의 모욕을 견딜 때 원주민에게 구출되어 그 자리에 나타난 그녀의 남편, 로저 칠링워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남편이었던 이에게 배신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했다. 그러나 불륜의 상대를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남편이었던 이는 '로저 칠링워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을 덮고 속죄하지 않는 이를 향한 복수를 하기 위해 마을에 정착한다.
헤스터는 말하지 않았지만, 로저는 불륜 상대를 알아채고 있었다. 그 지역의 명망높은 젊은 목사, 아서 딤스데일이었다. 그가 자신이 저지르고 숨기는 죄에 대해 말은 하지 못하면서 극심한 가책은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로저는 그의 담당의사가 되어 그가 숨기고 두려워하는 곳을 눈치 채지 못하게 자극하며 그를 더더욱 쇠약하게 만들었다.
속죄에는 제대로 된 방향성이 필요하다. 아무리 절절하게 사과를 풀어놓고 사죄를 하고 있는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피해자를 향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도 없다. 수많은 이들의 손가락질을 잠시 피하기 위한 간사한 몸놀림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주홍글자'는 마치 현실적인 헤스터와 딤즈데일의 이야기를 통해 현실에서 어떤 속죄가 제대로 된 방향성을 가지는 지에 대한 실례를 보여주며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말한다.
헤스터는 정석적인 속죄를 했다. 그녀는 대중의 모욕을 견뎠으며, 그의 전 남편에게도 사죄했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논의 했다. 그가 딤즈데일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도를 넘어 갈 때도 자신의 잘못을 다시금 인정하며 사과했다. 전남편인 로저 또한 '내가 복수하지 않아도 그만한 형벌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며 더 이상의 그 잘못을 묻지 않았다.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을 도왔고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도 자신의 과오인 주홍 글자를 가슴에서 떼지 않고 과오를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길을 제안해주며 살았다. 헤스터는 자신이 사죄해야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았고, 그 대상에게 사과했으며, 자신이 불러온 여파를 끝까지 감당했다. 그의 삶 전체가 다시 그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에 반해 딤즈데일은 자신의 평판, 위신, 커리어를 위해 말 없이 오롯이 혼자 과오를 감당하는 헤스터에게서 눈을 돌렸다. 본인은 계속해서 안으로 힘들었다고 말을 하고 있다.그가 속죄해야 하는건 혼자서 죄를 감당한 헤스터였고, 그 이전에 아내를 잃게 된 로저에게였고, 자신과의 관계 속에 태어난 펄이었다. 그러나 딤즈데일은 그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았다. 자신이 괴로운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속죄의 길을 걸어간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 것이 제대로 된 속죄인가? 괴롭다고, 속죄하고 있다고 말만하면 마땅히 자신이 속죄해야할 이들에게는 속죄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도 괜찮은가?
결국 다른 방향성은 그만한 결과를 불러온다. 그들의 가슴팤에 새겨진 주홍글자로 말이다. 헤스터의 주홍글자는 더 이상 간통을 뜻하는 낙인이 아니었다. 그는 유능했고, 의지가 되었다. 그녀의 주홍글자. 올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속죄한 주홍글자는 더 이상 죄의 낙인이 아닌 그 과오를 제대로 갚고 일어선 바른 속죄의 표상으로 가슴에서 빛났다.
그러나 딤즈데일은 마지막에도 대중앞에서 자신의 죄를 폭팔하듯 고하고 그자리에 쓰러져 죽을 때까지 정말 사죄해야 하는 이에게는 사죄하지 않고 세상을 등졌다. 끝까지 그는 로저에게도 헤스터에게도, 펄에게도 사죄하지 않았다. '나에게서 달아났구나!'라는 로저의 탄식처럼 딤즈데일은 죽음으로 도망치고 말았을 뿐이다. 그의 맨 가슴에는 기이하게도 주홍글자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떼어낼 수도 없는, 누구도 용서한 적 용서 받으려고도 하지 않은 죄의 낙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처럼, 인간이기 때문에 넘어진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 과오를 잊지 않고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오보다 중요한 건 그 다음에 어떤 속죄를 하느냐다. 그 속죄에 따라 그 과오의 낙인이 바른 속죄의 표상으로 빛나는가 지워지지 않는 죄의 낙인으로 남는가가 정해진다.
그러나 오늘을 보자. 신문의 사회면을 보던, 연예면을 보던, 그 어디를 가리지 않고 아서 딤즈데일만이 있다. 잘못했지 않았느냐 물으면 '나도 많이 힘들다'며 되려 성을 내고 이게 내 속죄라는 듯 당당하게 있는 하루가 멀다하고 질리지도 않고 보도되고 있다. 제2, 제3의 딤즈데일로 세기 힘들 정도다. 자신이 비난 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손가락질이 쏟아지는 것인데, 자신의 위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면피하기에 급급하다.
죄송하다, 법의 심판을 받겠다, 자숙하겠다. 국민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오늘도 이렇게 어느 범죄자가 말한다. 도대체 누구에게 죄송한 것인가? 누구에게 속죄하는 것인가? 이미 17세기에 그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한 이가 있는데도 아직도 자신의 체면, 위신이라는 이유로 그 과오를 제대로 갚아가며 바르게 나아갈 길을 버리고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자를 자신의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들에게 헤스터가 미련하고 불행한 길을 살아간 여인으로 보이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연일 뜨거운 '이미 회개했다'고 말하는 이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어느 이는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추궁에 자신도 정신병을 앓는다고 말하며 피하려 한다. 어느 이는 자신의 운전 미숙으로 일어난 사고에서 되려 역정을 낸다. 누구나 삶에 당당하지 않은 과오는 존재할 수 있다. 앞으로 생길 수도 있다. 당신도 그럴지 모른다. 당신도 그럴지 모른다. 정말로 그 과오가 부끄럽다면, 당당해지자. 정말로 체면을 지키고 싶고 위신을 챙기고 싶다면, 확실하게 인정하고 피해를 입은 이에게 사죄하자. 그 때 가슴에 새겨진 아프고 치욕스러운 주홍글자가 헤스터의 주홍글자처럼 바른 속죄의 표상으로 환하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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