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모든 일은 이 구절에서 시작되었다. 구원을 위한 신앙생활에서 편한 길을 찾지 말고, 고난이 있어도 참고 견디라는, 마태복음의 격언은 얄궂게도 한 남녀의 인생을 뒤틀어버렸다.
좁은 문 (Strait is the gate) | ||
앙드레 지드 지음 |
펭귄클래식 코리아 |
224p |
제롬은, 사촌인 알리사를 좋아했다. 아버지를 잃고 나서 외가와 지내게 되며 가까워진 알리사는 제롬에게 있어서는 다시 없을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제롬의 호감을 알리사 또한 느끼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랴. 알리사도 제롬이 좋았고, 그 당시 사촌 사이의 결혼은 아무런 흠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렇게 사랑하고,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아야 했다. 설령 그 과정이 조금 순탄치 않더라도 결과는 그럴 것이 당연했다.
둘 사이를 막는 장애물은 없었다, 알리사의 여동생인 줄리엣조차 자신의 제롬을 향한 호감을 거두고 언니를 응원했다. 알리사의 아버지도, 제롬의 어머니도, 주변의 누구든 그들을 응원했고, 그들이 그렇게 어울리 한 쌍이 되기를 바랬다. 제롬도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좁은 문은 만들어졌다. 그 누구도 아닌 알리사에 의해. 불륜상대와 야반도주를 한 어머니에 대한 반동일까, 그녀는 어릴 적, 제롬과 교회에서 함께 들었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채 자신을 강박적으로 불행과 고난의 틈으로 끼워 넣기 시작했다.
결국 그 과정에 같이 불행과 고난의 틈에 끼게 된 것은 알리사를 변함없이 좋아하는 제롬이었다. 알리사가 자신과의 관계 또한 ‘좁은 문’으로 가기 위한 과정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느끼고, 더 열정적으로 구애를 하기도, 강하게 나가 보기도, 약혼을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리사는 그러면 그럴수록 ‘사랑하기에 멀어져야 한다’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결국 서로 간의 대화는 줄어들고, 편지는 끊기기 시작했다. 알리사의 요청에 의해서.
결국, 제롬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음에도 사랑의 결실을 얻지 못한다. 그녀가 자신의 죽음으로 지독한 ‘좁은 문’의 여정을 끝낼 때까지 그녀는 제롬을 자신의 옆에서 지독하게 밀어냈다. 그리고 그 것이 진정한 행복을 위한 좁은 문이라고 굳게 믿었다.
알리사는 불행과 고난이 자신을 단련하고, 제롬과의 사이를 더 굳건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았을까? 그녀의 불행과 고난은 그녀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겪어야 할 불행과 고난 대신 장밋빛의 미래가 보이자 직접 그 고난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녀는 제롬을 자신의 곁에서 밀어내고, 편지를 일방적으로 끊고 자신이 싫다는 기운만 느끼면 제롬이 자신을 두고 떠나게 하면서 자신을 불행과 고난 속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만든 ‘좁은 문’에 갇혀버렸다. 성경의 구절에 따르는 것이 아닌 자기 멋대로 해석한 자신의 사상을 따랐다. 제롬과의 추억이 담긴 책을 모두 버리고 불행한 이들의 자기미화 서적을 보며 자신에게는 필요한 책이라며 대화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알리사의 모습에서는 어떤 종교적 숭고한 모습도, 역경을 이겨내는 기상도 보이지 않았다.
알리사는 없고 발에 채이듯 보이는 사이비 광신도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누구도 알리사를 불행하게 하지 않았다. 그녀를 무시하지도 않았고, 범죄로 끌고 가지도 않았다. 어머니의 불륜만이 상처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는 여동생과, 아버지와, 제롬으로 충분히 메울 수 있는 상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을 불행으로 끌어들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며 그렇게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 누구도 주지 않은 불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기적이다. 우습다. 지금껏 수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이렇게 등장인물에게 간결하게 비판적 감상을 취하게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알리사의 면모, 제롬의 감정을 뼈에 새기듯 쓴 앙드레 지드의 문장력도 문장력이지만, 알리사라는 불행을 만들어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는 광신도적 인간상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더욱 그렇다. 바로 우리 곁에 있어서 그렇다.
사실 정말로 불행한 사람도 아님에도 자기가 직접 불행을 만들고, 행복을 걷어차면서 ‘나는 너무 불행하다. 그런 불행을 이기는 내가 아름답다.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은 나쁘다’ 라며 자신을 정의를 넘어 신성하게 만드는 이들이 도처에 널린 지금이다. 그 잘못을 지적하면 죽어라 달려든다. 아무리 친한 이라도 그렇다. 결국, 그들의 제롬은 그들 곁을 떠나고 그들 곁에는 알리사의 책장에 꽂힌 책들 마냥 자신들의 ‘만들어진 좁은 문’을 칭찬하고 위로하기 위한 이들만 모인다. 그 곳에서 쾌감을 느낀다.
지금 내가 타자를 치는 이 순간에도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불행을 일어났다 하기 위해 글을 고치고, 사진을 조작하며, 수많은 다른 알리사들을 동원해 여론을 조작하는 일이 SNS에서, 대학 대자보에서, 뉴스 한 켠에서 일어나고 있다. 과연 그 만들어진 좁은 문이, 그 좁은 문에서 조금씩 스며드는 쾌감이 자신의 인생을 행복으로 이끌 수 있을까? 자신의 주변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조금 더 세상이 아름다워 질 수는 있을까?
그 끝없는 만들어진 불행의 끝에는 후회만이 남는다. 결국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제롬을 찾으면서 자신이 만든 불행을 버리지 못해 다시 밀어내는 딜레마에 빠진 알리사는 자신이 제롬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 병에 걸려 요양원을 전전하다 외롭게 죽는다. 그녀의 좁은 문 뒤에는 무엇이 남았는가.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 믿었지만 행복한 이는 누구도 없었다. 본인도, 주변도, 그가 지내던 그 세상도 아름답지 못했다. 만들어진 불행은, 그 자기위로의 쾌감은 자신을 말려 죽일 뿐이다.
앙드레 지드는 경직된 청교도 교육 아래 자랐다. 그의 어린 시절은 성경의 한 구절을 왜곡해 자신의 가족마저 괴롭게 만드는 우습고 이기적인 ‘좁은 문’을 만드는 이들이 넘쳐났다. 강산이 몇 번이 바뀌고 그가 숨쉬던 곳과는 반대에 있는 이 곳에는 아직도 종교, 가난, 성별, 등의 명패를 붙인 ‘좁은 문’을 경쟁하듯 만드는 이들이 있다.
그 광신적 자기위로의 끝은 어디일까? 누구를 위한 것일까?
|
▶도움이 되셨다면 돌아가시기 전에 공감버튼 부탁드립니다
'책 > 명작마시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2권 명작마시기]9.설국 -덧없지만 아름답다 (1) | 2018.06.25 |
---|---|
[52권 명작마시기] 8.주홍글자 - 속죄의 방향성 (0) | 2018.02.01 |
[52권 명작마시기]6. 오만과 편견 - 불편한 당신도 불편하다 (0) | 2017.10.06 |
[52권 명작마시기]5. 인간의 굴레_그는 후회한다, 그리고 또 (0) | 2017.09.12 |
[52권 명작마시기]4.제인 에어 (0) | 2016.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