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드디어 일본, 그런데 숙소까지는?
2시간여의 비행으로 살짝 피곤해질 때쯤,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는 기장의 상쾌한 말을 들었다.
드디어, 드디어 일본이구나. 내가 해외여행을 혼자 나와있구나라는 들뜬 기분에 다른 어떤 것도 상관이 없어졌다.
계속 비행기 내에서 숙소가 없다며 같이 다니자는 이상한 사람 하나를 빼면 말이다.
아무리 숙소가 없대도, 보통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저렇게 업혀다니려고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그 사람을 뒤로 하고 수속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간사이 국제공항 모노레일 안에서. 불청객이 있어도 일단은 일본이다.
모노레일을 타고 입국심사대를 가볍게 지나쳐 수하물을 찾았다. 뭔가 미국 입국심사처럼 철저한 걸 생각했지만, 형식적인 몇 가지의 질문을 끝내곤 지나갈 수 있었다.
짐을 찾고, 간사이 국제공항을 좀 넉넉하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비행기에서부터 계속 뒤를 따라오는 사람을 떼어내기 위해서 다른 것을 보지도 못하고 2층 전철역으로 쫓기듯 내려갔다.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숙소에 가까운 우메다역까지 가는 방법은 크게 리무진 버스, 택시, 철도 세가지였다.
이 중에서 한 번 이동하는데만 15만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하는 택시는 당연하게 고려에서 제외할 수 밖에 없었다.
리무진 버스는 좋은 선택지였지만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는 이상한 사람을 떨쳐내지 못하면 이대로 우메다까지 불편한 동행을 해야 할 것이다. 아쉽지만 귀국할 때 시도해보자고 생각하며 발을 움직였다.
결국 탈 수 있는 건 철도 뿐, 한국의 그 복잡한 서울지하철도 매일 이용하는데, 철도가 뭐 그렇게 어려울까 생각했다.
그러나 2층에 내려가니 나를 맞는 건 수많은 인파와 무언가 버튼이 잔뜩 붙어있는 발권기였다.
아무리 일본어를 오래 배우고 유창하다 자부한다해도 첫 일본, 첫 발권이었다. 터치스크린 옆에 잔뜩 달려있는 버튼들. 뭘 읽어보기도 전에 내 뒤로 줄을 서는 사람들. 당황해서 빨리 발권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이드북을 펼쳤다.
JR은 비싸다고 했으니 일단 난카이. 난카이 중에서도 가장 싼 공항급행이 920엔이었다. 맞긴 맞는지 확인도 못하고 곧장 터치스크린에 떠있는 '920'을 누르고 돈을 집어넣었다. 10년만에 보는 듯한 작은 탑승권이 튀어나왔다.
▲얼마만에 보는 전철표인지, 감회가 새로웠다 (공항급행이 아닌 쥬소를 갈 때 산 표다.)
표를 챙기고 다시 아래로, 아래로 향하니 마침 딱 맞춰 대기하고 있는 전철이 보였다. 이게 특급열차인 라피토면 어쩌나 싶었지만, 조금 더 고급스러운 열차가 반댓편에 서있는 것을 보니 이게 공항급행인가보다하고 달려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했다. 뭔가 나무 질감이 가득한 열차였다. 왠지 고즈넉하고 조용한 열차였다. 오사카로 여행을 온 사람도 많을테고 그만큼 시끄럽지 않을까 했지만 쥐죽은 듯 조용했다. 열차는 미끄러지듯 철로를 달렸다.
▲열차 밖으로는 큰 고층빌딩이 보이지 않았다. 교외에서도 아파트단지가 즐비한 한국과는 다른 생소한 풍경이었다.
아 드디어 일본이구나. 내가 한국이 아닌 곳에 나와있다. 그 감정이 왜 그렇게 감동적인지. 이미 여행을 마치고 견문이 넓어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열차가 천천히 멈췄다. '우메다(梅田)'. 오사카의 북부 중심지에 드디어 도착했다. 수많은 일본인들, 낯선 간판. 이국의 소리. 조용한 전철을 지나 정말 살아있는 일본에 도착한 것이다.
②패스는 어떻게 하지?
우메다에 내려 기분좋은 두근거림에 사로잡힌 것도 잠깐, 앞으로 교통에 대해서 생각해야 했다. 일본 교통비가 보통이 아니라는 소리는 익히 들었으니까, 최대한 아껴야만 했다. 지갑은 최대한 쥐어짜내어 왔지만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어떤 종류의 어떤 패스가 있는지,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한 정거장 떨어져있는 쥬소에만 가면 되는 거니 내일 알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이 문제를 내일까지 끌고 가서 허둥대면 내일의 일정이 늦어질 것이 분명했다. 얼른 가지고 있는 가장 믿을만한 구석, 가이드북을 펼쳤다.
가장 주요한 세 개의 패스 중에 하나. 나는 어떻게든 오사카의 유명한 모든 것을 누비며 오사카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오사카 주유패스를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봐도 5~6개의 시설은 이용할 것 같았고 다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교통비 이상의 돈이 나가기 때문에 충분히 경제적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미리 사두자는 생각으로 우메다 역 안에 있다는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문제는 우메다 역이 쇼핑센터를 겸하고 있어 무척 넓다는 것이었다. 강남역 지하상가를 2~3층정도로 쌓아둔 크기의 복잡함에 아무리 표지판을 찾아도 어디로 가는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우메다 역의 쇼핑센터의 극히 일부. 우메다 역은 정말로 너무나도 넓었다.
그렇게 40분은 헤맸을까, 드디어 모퉁이를 돌자 관광안내소가 보였다. 드디어 끝났다!는 희열은 금새 허탈감으로 바뀌었다. 20분 정도의 차이로 관광안내소가 문을 닫은 것이다. 화를 낼래도 이른 시간도 아니었고, 웃음밖에 안나오는 내 방향감각에 대한 경의를 보낼 뿐이었다.
(보통 관광안내소는 9시에 문을 열어 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 http://www.osaka-info.jp/kr/plan/practical_information/travel_passes/ 에서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고 독자들은 헛걸음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이런 바보 같은 헤메임도 여행의 묘미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지도에 메모를 했다. 적어도 내일은 헤메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면서.
③첫 식사, 첫 디저트
짐을 적당히 숙소에 풀어둔 후 다시 우메다로 돌아왔다. 확실히 쥬소에 있는 숙소와 우메다는 전철로 한 정거장, 3분 남짓이라 체크인을 하고 짐을 푼 후 몸을 추스려 다시 우메다로 돌아오는데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확실히 숙소를 잘잡았다고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벌써 8시 반이 넘어가는 시간. 아무리 첫 여행, 첫 날이라고 기운이 넘쳐도 이대로면 배고파서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았다. 일본에 기왕 왔으니, 첫 저녁은 가장 일식스러운 것을 먹자고 생각했다.
오사카 역에서 바로 이어지는 '오사카스테이션시티'를 돌아다니며 어떤 것이 가장 맛있을까 하던 차 코를 끄는 곳이 있었다. 잔뜩 나무로 인테리어가 되고 밖에서 종업원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는 작은 매장이었다.
▲닭요리 전문점 '토리상와' 1900년, 나고야에서 개업한 유명점포라 한다.
이름은 '토리상와(鷄三和)'. 닭고기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도 늘 먹는 닭, 다른 닭요리라면 생각을 해봤겠지만 주메뉴가 오야꼬동이라니, 얼마나 일식스러운가. 배도 충분히 고팠고 더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들어갔다.
10석이 될까 말까 하는 작은 좌석들로 가득 들어찬 생각보다 작은 곳이었다. 내부는 퇴근 후의 담소를 나누는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843엔짜리 가장 기본적인 오야꼬동을 시켰고 잠시 그들의 일상을 즐기며 발의 피로를 풀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단촐하지만 막 만들어진 따듯한 오야꼬동이 그릇 한가득 담겨나왔다.
한국에서도 돈부리는 많이 먹었고, 그만큼 오야꼬동도 많이 먹었다. 하지만 역시 본토에서 먹는 음식은 다른 것일까. 오야꼬동의 맛은 상상이상이었다.
밥은 흰 쌀밥으로도 충분히 맛있었고, 알알이 소스가 배어들어 어디도 간이 덜 된 곳이 없었다. 닭고기는 계란으로 부드럽게 감싸져서 퍽퍽하지도, 지방이 많지도 않은 부위로만 재단되어 입을 즐겁게 했다.
거기에 들어올때부터 느껴지는 따뜻한 등불 아래의 현지 직장인들의 목소리는 알아듣다가도 못 알아들을 소리더라도 그 자체로 여행의 분위기를 끌어올려주어 안그래도 맛있는 오야꼬동을 한층 더 맛있게 만들어줬다.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게 오야꼬동은 사라졌고, 맑은 국물(이게 아직 뭔지 잘 모르겠다)로 속을 데우며 디저트를 찾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 식사를 제대로 마무리지어줄 훌륭한 디저트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이왕이면 한국에서 자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디저트를 찾았고 결론은 '타르트'였다. 당초 일본에 와서 꼭 먹고자 한 것이 타르트와 파르페였다. 둘 다 한국에선 아직까지 활성화되지 않은 디저트다. 하는 집을 찾기도 힘들고, 종류가 많거나 맛을 인정받은 집은 더더욱 적다. 어떻게든 이 둘은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본에 온 차였다.
마침 우메다에 오사카에서 가장 맛있는 타르트 전문점이 있었다. '킬페봉(quil' fait bon)' 과일타르트를 전문으로 하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타르트 전문점이었다.
▲타르트 전문점 킬페봉. 오사카 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 존재하는 유명점이다.
우메다역에 이어져 있는 대형쇼핑몰 '그랑프론트오사카'(가든파이브처럼 생겼지만 조금 더 크다)에 위치해 있어 가는데 그렇게 큰 노력은 들지 않았다. 가게 앞은 이미 대기하고 있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보통 때였으면 이렇게 기다리는 일은 하지 않겠지만, 이왕 온 여행 아닌가. 포기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테이크아웃 손님이 많아서 금새 들어가서 타르트를 구경할 수 있었다. 내부 좌석은 꽤 있는 편이었지만 많다고도 할 수 없는 편이어서 나 또한 테이크아웃으로 시켜 숙소에 들어가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타르트를 고르기 시작했다.
▲당시 계절메뉴였던 베리타르트. 계절 한정메뉴가 무엇보다 맛있으니, 간다면 계절한정을 추천한다.
말그대로 타르트의 천국이었다. 20~30개종의 다양한 타르트들은 자금만 허락한다면 한 피스씩 모두 사가지고 가고 싶을 정도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싱싱한 과일타르트부터 진한 초코,치즈타르트들까지. 없는게 없었다. 한 피스에 꽤나 비싼 가격이었지만(한국에 오고나서야 그 타르트가 합리적이고 저렴한 편이었단 것을 알았다.) 망설임 없이 계절한정 베리타르트를 포장해 나왔다.
밖은 이미 도시가 어둠에 잠겼다. 높은 빌딩들은 별처럼 반짝였고, 3월 초순의 바람은 선선하니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쥬소역에서 내리자 고층 빌딩은 적고 야트막한 빌라들이 가득한 주택가로 바뀌었다. 시장 점포들에선 폐점세일을 했고, 이자카야는 생기가 넘쳤다. 분명 온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무척이나 이 분위기에 동화된 듯 했다. 퇴근길 타르트를 사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5일간 내 앞마당처럼 돌아다녔던 쥬소의 중심가. 특유의 거리분위기가 날 동화시켰다.
그렇게 가볍게 첫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다. 작지만 빠질 것 하나 없는 호텔. 1인실은 난방이 잘되고 있었다. 샤워를 가볍게 하고 책상에 앉아 내일 일정을 고민했다. 교토가 볼 게 더 많긴 하니 먼저 오사카를 가볍게 하루 보는 것으로 하자고 생각하며 가이드북 여기저기에 체크를 했다.
재밌다. 정말 재밌다. 여행은 막연하고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막상 겪으니 모든 것이 해프닝이 되고 모든 것이 즐거움이 된다.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텐데, 후회아닌 후회를 하며 내일은 더 많은 일을 겪자고 생각하니 기대가 가득해졌다. 내일은 또 어디를 처음 보게 될까. 무엇을 처음 먹게 될까. '처음'이 즐겁다는 것을 왠지 처음 느낀 듯 했다.
*포장해서 가져온 베리타르트는 예상이상의 맛이었다. 과일은 과육이 한입한입마다 새콤하게 터졌고, 잘 구워진 타르트지 위에 진득히 발라진 크림은 베리와 너무 잘 맞았다. 한국에 지점을 낼 생각이 있다면, 내가 먼저 손을 들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하게 되는 인생디저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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