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오늘부터는 교토
얼굴에 햇빛이 살랑였다. 아침이다. 발은 욱신대지만 여전히 몸에 활기는 넘친다. 오늘은 또 완전히 다른 도시를 마주할 생각에 마음속에 설렘이 일렁였다. 4박 5일의 일정 중 첫날과 이틀은 오사카, 나머지 이틀은 오롯이 교토를 돌아보는데 쓰기로 계획한 참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사흘 째, 교토를 가는 날이다. 어제까지의 활기찬 현대의 일본과는 또 다르겠지. 고즈넉한 문화재들이 나를 반긴다. 그들은 나에게 뭐라고 속삭일까.
아침식사는 교토에서 편의점에 들르기로 했다. 이왕이면 사람들이 들어차기 전에 교토의 문화재들을 하나라도 더 보기위해서는 아침 일찍부터 채비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 갈 동선을 한 번 파악하고, 쥬소역에서 한큐선을 탔다. 움직일 것 없이 카와라마치역까지 가기만 하면 단돈 400엔에 완전히 다른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1
전철은 움직인다. 햇빛이 따스하게 비치는 완행열차. 안에는 꾸벅꾸벅 조는 이들만이 있었다. 도시의 전철이 아닌 완연한 교외풍경은 쥬소에서 출발하는 열차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듯 했다. 창밖으로는 점점 높은 아파트와 맨션이 사라지고 다시금 단독주택이 삐뚤빼뚤 귀여운 스카이라인을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새마을호를 타본 적 없는데, 열차여행의 낭만을 일본에서 먼저 즐기게 될 줄은 몰랐다. 아침햇살과 고동 같은 열차소리에 즐거운 마음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눈도 졸음을 못 이기고 흘러내렸다.
덜컹, 차가 멈췄다. 카와라마치(河原町)역이다. 한큐선의 종점이자 교토여행의 중심지다. 역에서 나오자 수많은 버스의 행렬이 보였다. 맞아. 패스를 사야지. 보통 교토에서 가장 많이 쓰는 패스는 두 가지다. 버스 1일 승차권과 관광 1일 승차권. 2 차이는 버스만이냐, 전철까지냐인데, 교토의 주요 역사문화재가 있는 중심부는 버스로 모두 커버가 가능한 편이어서 버스 1일 승차권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분명 JR교토역에 가면 살 수 있다고 써있었다. 한 번 버스를 타고 교토역까지 가야하는 걸까. 시간도 없는데. 3
그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살짝 쌀쌀한 날씨에 지도를 보려 다시 역사로 들어오니 투어리스트 센터가 눈에 보였다. 버스 티켓이라고도 써있는 것을 보니 파는 것이 분명했다. 들어가 여권을 내밀고 버스 1일권을 구입했다. 아무래도 조금 규모가 되는 역사에는 투어리스트 센터가 있고 버스 1일권을 파는 모양이다. 5천원이라, 우리나라에서도 조금만 많이 돌아다니면 쓰는데 일본에서 이 만큼을 못쓰랴. 4
▲교토 1일 승차권. 이것만 있으면 버스가 교토에서 내 발이 되줄 것이다.
승차권을 사고, 끼니를 적당히 챙겼다. 오늘의 아침은 야끼소바. 지금껏 일본 편의점에서 먹은 건 모두 맛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야끼소바는 아닌 것 같다. 어째 면의 종주국인데도 편의점의 일본 면 요리가 이 모양이라니. 뭔가 실망을 금치 못할 맛이었다. 팅팅 불고 간장에 몸만 살짝 담군채 말려놓은 맛 같은 괴식은 입맛이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다음에 일본을 온다면 절대 야끼소바만큼은 편의점에서 먹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② 일본의 미의 이름, 긴가쿠지(은각사)
어쨌든 이제 교통수단도, 끼니도 해결되었다. 처음으로 갈 목적지는 정해져있었다. 긴가쿠지(銀閣寺), 은각사. 처음 교토에 올 때부터 무조건 처음 가려고 한 곳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일본식 정원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한 곳.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교토에 다녀온 이들이 열이라면 아홉은 찬사를 보내던 곳이기에 따로 생각할 것도 없이 교토 여행의 기점을 긴가쿠지로 잡았다.
버스를 타자 다시 아침햇살이 나를 훑어내리기 시작했다. 다른 여행기를 찾아봐도 그렇고, 내가 가지고 간 가이드북도 그렇고 버스 여행은 힘들다며 지도까지 넣어줬는데, 이 정보화시대에 그럴 필요가 있는지 싶을 정도로 쉽고 간단했다. 단지 구글 맵스(Google maps)로 길만 찾으면 되는데 말이다. 몇 분이 걸리는지, 무슨 버스를 타야하는지, 몇 정거장이 남았는지 다 알려주는데 어려울리가 없다. 아무래도 한국에선 구글 맵스가 힘을 못써서 사용할 생각도 안했을 수도 있지만, 이 시대에 버스가 어렵다고 겁을 줄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일본 버스는 쉬웠다.
30분쯤 지나서 버스에서 내리자 야트막한 건물들 사이로 은각사를 가르키는 표지판이 보였다. 모든 길 거리가 한산한데, 유적은 많아서 그런지 굉장히 길찾기가 편안했다. 엄청난 길치인 나조차 길을 헤멘 적이 없이 은각사 앞까지 도착했으니 말이다. 은각사 앞에 도착하자. 그 유명한 철학의 길(哲学の道)이 나를 반겼다. 600년이 다 되어가는 고사찰과 이름만으로 걷고 싶어지는 거리. 가슴에 로망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철학의 길 표지판. 이 표지판을 기점으로 앞으로 나가면 긴가쿠지, 좌측 길을 따라가면 철학의 길이다.
철학의 길은 곁눈질로 봐도 무척 아름다워 바로 걷고 싶었지만, 일단은 긴가쿠지가 먼저다. 다리를 건너 긴가쿠지 산도로 들어서자 그림으로 그려두는 듯한 1~2층 짜리 뾰족지붕을 가진 상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개성적이면서도 아름다워서 촬영을 하는 것을 멈출 수 가 없었다.
▲셔터를 누를 수 밖에 없는 긴가쿠지산도. 어디를 가도 부담 없이 예쁜 상점가들이 늘어섰다.
오사카는 현대적이고, 솔직히 건물들이 아름답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교토는 아직 긴가쿠지는 들어가지도 않았음에도, 고즈넉하고 오밀조밀한 낭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은 있어도 모두 상대의 귀에 대고 소근대고 있었다. 마치 이 곳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맘에 들었다.
▲긴가쿠지 입구. 너무 소박한 문이라 이 곳이 맞나 의심이 들었다.
움직이는지도 모르고 사진을 찍으며 앞으로 가다보니, 소박하고 아담한 낡은 문이 하나 나왔다. 산도(참배로)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관광객들이 전부 들어가는 것 보면 분명히 저 곳이 긴가쿠지였는데, 세계문화유산, 600년이나 된 고사찰의 문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고, 소박했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뒤로 펼쳐진 녹음과 바람에 흝어지는 이파리 소리와 이 문은 연결된 것 같아, 마치 완전히 다른 세계, 과거로 들어가는 입구같은 느낌을 주었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바로 별천지가 펼쳐졌다.
방금 전 문단에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라고 했는데, 그 말 그대로였다. 아직 매표소는 나오지도 않은 단순한 입구임에도 불구하고 어디 판타지에나 나올법한 정원수의 벽은 방금 앞에서 보았던 작고 낡은 문 뒤로 펼쳐져 있는 곳이 맞는가 하는 의문을 주었다. 뭔가 시대를 잘못 생각한 듯한 녹음의 성벽은 너무나 잘 정돈되어 이질감이 들 정도였다. 분명히 살아있는 나무인데 나무 같지 않고, 성벽같은데 인공물은 아니었다. 햇빛도 겨우 기어들어오는 벽 사이의 길을 걷자니 이 벽이 살아움직여 나를 휘감아채도 모를 것 같다는 기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긴가쿠지의 티켓, 티켓 대용으로 가정의 행운과 평화를 기원하는 부적을 준다. 5
녹음의 성벽이 끝나자 매표소가 나왔다. 티켓 대신으로 준 길쭉한 팜플렛과 부적은 역시 단순히 행운과 평화를 기원하는 부적보다는 다른 세계와 현 세계를 연결하는 티켓 같이 보였다. 이런 작은 티켓 하나도 전부 컨셉에 맞춰 신경쓰다니, 과연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갈 가치가 있을만했다.
▲본격적인 긴가쿠지의 시작. 뒤에 나올 정원과는 비교도 안될 작은 정원이지만 아름답다.
매표소를 넘어 고개를 내미니, 기가 막히게 잘 정돈되어 있는 작은 모래정원과 소나무들이 나를 반겼다. 이 곳이 겨우 시작임에도 셔터를 누를 수 밖에 없는 조형미였다. 도대체 이 곳을 만든 이는 누구였기에 이토록 처음부터 혀를 내두를 별천지를 만든 것일까. 그는 어떤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보고 있는 것에 감탄하고,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상상하게 만드는 난생 처음보는 스케일과 구조의 아름다움에 나는 점차 빨려들어갔다.
▲긴가쿠지의 2층 누각, 긴가쿠와 모래정원 긴샤단. 연못을 둘러 싼 정원
다시 문을 하나 넘어가니 그 곳에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정원이 있었다. 줄무늬가 선명해 처음 볼 때는 누군가 색을 칠해놓은 건가 싶었지만, 그 하얀 정원의 줄무늬는 전부 돌이었다. 이 하얀정원, 긴샤단을 캔버스 삼아 흰 모래가 마치 산처럼 단단하게 쌓아 올려진 코게츠다이가 있었고, 사시사철의 푸르름을 자랑하는 소나무들이 딱 있어야 할 자리에 최소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뒤로는 2층 누각 긴가쿠가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긴샤단과 맞닿은 연못은 법당 6을 휘감고 있었고, 이 모습대로가 가장 아름답다는 듯이 돌과 소나무가 엉켜 자태를 뽐냈다. 7
▲긴샤단만이 전부가 아니다. 긴가쿠지의 진짜 정원은 이곳이다. 8
긴샤단의 뒷편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니 지천에 이끼가 끼어있었다. 그러나 그 이끼는 돌보지 않은 습한 곳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이끼의 종류가 아닌, 어떻게 하면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지 생각하며 바닥에 깔아둔 듯 했다. 나무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빛은 이끼에 비추어 초록빛이 아닌 금빛으로 빛났고, 공기로 다시 흩뿌려져 아직 습기가 날아가지 않은 아침 공기에 퍼져 안개처럼 자욱해졌다. 중앙으론 시냇물이 모여 작은 연못을 만들었고, 연못 주위로 은방울꽃들이 그 자태를 뽐냈다. 일본에 와서 벚꽃을 못봐 아쉽다는 생각은 이 때의 은방울 가득한 정원을 본 이후로 없어졌다.
▲긴가쿠지가 전부 내려다 보이는 정원의 끝자락
정원의 끝자락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보니 은각사의 정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 마련되어 있었다. 긴가쿠와 긴샤단, 토쿠도. 모든 것이 하나의 퍼즐처럼 맞춰져 아름답게 빛났다. 그 뒤로 까마득히 보이는 교토자락도 각도를 잰 것처럼 그 뒤로 사이좋게 어깨를 놓고 있었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사진을 찍을 수 밖에 없었고, 어느 곳을 봐도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 때까지 살면서 본 인간이 만든 정원 중 가장 아름답다고 느꼈다. 흔히 우리의 정원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선을 따라 건축을 한다고 하고, 일본의 정원은 제작자가 만들고 싶은대로 자연을 인공물과 어우러지게 정돈한다고 한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상상만 하고 있었는데, 이 긴가쿠지에는 실제로 존재했다. 600년 전 쇼군이 보고 싶었던 정돈된 정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정돈되어 화폭에 그리는 대로, 사진기에 담는대로 그림이 될 것 같았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비율에 고심을 했다는 것이리라. 어떻게 하면 교토 시내와 아름답게 맞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누각과 정원을 가장 아름답게 맞춰 배치할 수 있을까. 소나무는 모래정원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가. 그 세밀한 정원의 배치에 대한 고민은 내 마음에 울렸다. 이것이 일본의 미(美)리라.
제품 하나를 만들 때도 사용하는 이가 편리할 수 있게 편의성을 최대한 고려하는 일본인들의 감각은, 미학에서 가장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보는 이가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아름다움은 어떤 것일까. 햇빛이 비취는 곳에서 차를 마시며 볼 때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무엇일까. 그들의 사용자에 대한 배려를 기반으로 한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은 이 은각사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일본을 대표하는 아름다움으로 보였다. 그 미에 우열은 없었다. 일본의 미는 일본의 미로 600년이 지나 내게 다가왔다.
은각사는 지금까지도 일본의 미의 이름으로 내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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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우메다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급행이던, 통상이던 모두 400엔. [본문으로]
- 시영버스, 교토버스 이용가능. 2번만 이용해도 본전이다. 1일 500엔. [본문으로]
- 시/교토 버스와 지하철까지 모든 대중교통 이용가능. 입장료 할인혜택 제공. 1일 1200엔, 2일 2000엔. [본문으로]
- 투어리스트 센터 뿐 아니라, 정기권 판매소, 시영버스 영업소, 버스 안에서도 구매 가능하다. (버스는 품절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본문으로]
- 성인 500엔, 중학생 이하 300엔 [본문으로]
- 긴가쿠의 누각은 층별로 건축 양식이 다르다. 1층은 전통 일본 양식을 따르나, 2층은 중국 사찰양식으로 만들어져 있어 특이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본문으로]
-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쇼인츠쿠리양식(무사계급의 전통적 양식)으로 지어진 토쿠도다. [본문으로]
- 킨쿄치(상단 사진)를 중심으로 조성된 지천회유식 정원. 이끼정원이 세계제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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