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나 혼자 빠른 아침
아침 7시, 꽤나 지쳤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는 떠지지도 않던 눈이 알람에 맞춰 떠졌다. 몸은 가볍고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오늘의 일정은 오사카를 주유패스로 도는 것이었다. 우메다로 가서 주유패스를 사고, 오사카성을 보고 난바를 본 후 저녁에 우메다로 올라오는 꽤 급한 오사카 일주 코스였다. 세부적인 일정을 지도를 펼치고 가장 짧은 원을 그으면서 다시 한 번 메모했다.
달리 아침에 말을 할 이도 없고, 같이 밥을 먹을 이도 없기에 바로 적당히 짐을 싸서 밖으로 나왔다. 3월 첫 주라면 한국에서는 겨울이나 다름없이 쌀쌀했기에 얇은 옷 두 세장에 좀 두꺼운 야구잠바를 입었다. 이 일이 실수인 것을 안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부산보다 한참 아래에 위치한 오사카는 이미 우리나라로 치면 3월 말쯤 되는 쾌적하고 따뜻한 날씨였던 것이다. 이 날 땀범벅이 된 이후 나는 최대한 가볍게 옷을 입게 되었다.
▲쥬소의 아침은 조용했다.
해는 벌써 환하게 머리 위를 밝히는 7시. 한국이었다면 이미 어느 곳이던 출근하는 인파로 북적일 시간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4일의 여행-그 이후의 여행-에서도 놀랍게 조용한 아침을 보여줬다. 마치 그 것이 당연한 것처럼. 조금 이르게 나오는 고등학생들과 시장사람들 정도가 전부. 이 시간부터 짐을 싸서 나온 건 나 밖에 없어 보였다.
우메다로 가는 전철 안도 적당하게 한산했다. 앉을 자리도 있었고, 햇살이 밝게 비추는 것과는 언밸런스하게 아직은 누구도 일할 생각이 없었다. 일본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 우메다를 돌아다니자니 어딘가 내가 사는 시간과 다른 시간을 사는 듯한 신기한 느낌이었다.
우메다에 도착하고도 아직 8시가 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투어리스트 센터는 문을 열지 않았다. 마침 딱 배도 고프고, 적당하게 편의점에 들어가 끼니를 때우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뭐람. 생각보다 다채로운 편의점이었다. 한국도 이제는 사실상 대형마트와 다를 것이 없고 각종 디저트도 잘 구비된 편의점이 많다고 하나 10개중 2~3개의 경우다. 그에 비하면 일본은 정말로 눈이 돌아갈 정도로 다양한 음식들과 물품이 있었다.
.그 중 꽤 맛있어 보이는 샌드위치를 하나 들었다. 150엔이 안되는 가격. 그에 맞지 않게 맛있는 샌드위치였다. 빵 끝부터 끝까지 가득 차있는 야채와 고기는 과연 2000원도 안되는 샌드위치가 맞나 의심이 들었다. 대학생활 2년, 편의점 생활은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다. 첫 아르바이트가 편의점이었고, 언제나 점심은 돈을 아끼기 위해 편의점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일본의 편의점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8시가 되어도 여전히 거리는 한산했다. 투어리스트 센터는 막 개장했지만 다른 가게들은 아직 열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투어리스트 센터에서 주유패스를 사들었다. 패스 하나만 줄 거라 생각했는데, 직원은 패스가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안에는 다양한 팜플렛, 우리 말로 되어있는 안내서, 브로셔들이 들어있었다. 굳이 이렇게 잘 포장을 해줄 이유가 있을까 싶었지만. 뭐, 이것도 일본의 오모테나시(마음을 다해 손님을 맞는 태도)의 한 발로 아니겠는가. 기분 좋게 누리기로 했다.
▲이틀만에 손에 넣은 주유패스 1일권, 첫 목표인 오사카성이 보인다.
어찌되었든 이제 오사카성에 가자. 오사카라고 하면 역시 오사카성과 도톤보리의 구리코(손 들고 달리는 네온간판) 아니겠는가. 히가시우메다역에서 타니마치선으로 4정거장, 타니마치욘초메역에 내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으로 나오자 뭔가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뭔지 잘 보이진 않아도 저정도로 크고 특이한 건물이라면 관심이 동한다. 기대하는 걸음으로 건물에 다가갔다.
▲오사카 역사박물관, 그러나 이 곳을 들르기엔 너무 일렀다. (개관시간 9시 30분~17시)
역시나, 그 곳은 오사카 역사박물관이었다. 수능으로 이른바 3사(근현대사, 동아시아사, 한국사)를 치룰 만큼 역사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나에게는 최적의 여행코스였다. 신나는 마음으로 안에 들어가 가이드를 들으려 했지만, 아뿔사, 이 곳도 아직 열지 않았다. 9시가 다되었는데 말이다. 보통은 9시면 모든 곳이 활발하게 열리는 한국의 시간으로 감을 잡기엔 아직도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일본인들의 삶은 얼마나 느린 것일까? 아침이 넘어 우리에게는 이미 해가 중천인 시간이지만 이 번화가 오사카에 차는 한산하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행객조차 많지 않았다. 아침잠이 없는 노인들만 아침운동을 하러 나왔을 뿐. 이 세상에 열심히 움직이는 건 나 혼자 뿐인 느낌이었다. 도대체, 일본의 아침은 언제 오는 걸까? 아니, 우리의 아침이 지나치게 빠른 것이었을까?
② 타이밍이 잘 안 맞은걸까, 오사카 성.
뭐 어찌되었든, 이렇게 되었으면 예정대로 오사카성에 먼저 들러야했기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얼마 걷지도 않아 차도가 끊기고 드넓은 정원이 등장했다. 오사카 성 공원이었다. 정말 꽃이 피면 아름다울 정원이었지만, 아쉽게도 3월에 첫 주, 아무리 봄이 빨리 온 오사카에도 아직 꽃은 이른 시기였다. 그래도 명소는 명소. 일본 입장에서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연신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오사카에서 맞은 첫 아침. 드디어 사람이 있는 움직이는 오사카를 만나게 되었다.
▲오사카 성 공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역사 박물관이 보인다.
오사카 성 공원은 황폐화된 오사카성의 외측 부분을 공원으로 바꾼 장소다. 본디 따지면 이미 오사카 성 안이라는 것이다. 오사카 성의 원 축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조했을 당시에는 두 개의 해자가 있어 적의 침입을 방어했는데, 알다시피 일본의 주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되었고, 전 지도자의 성은 메워지고 개조되었다. 웅장한 해자 또한 하나만 남게 되었고, 메워진 해자 위는 벚나무가 잔뜩 심겨진 종합문화시설이 되었다. 공원에는 산책로 뿐 아니라 공연장, 야구장 등도 있다는 사실을 알곤 입을 다실 수 밖에 없었다. 벚꽃도 못보고, 일본 야구도 못보다니. 정말로 아침만이 아니라 나는 그저 너무 빠르게 온 것 아닐까?
▲오사카 성 입구(좌)와 오사카 성 공원(우). 안에 있던 작은 해자만도 이만한데, 원 크기는 얼마나 컸을까?
얼마나 아쉽던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원을 조금 더 산책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빡빡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기에 발걸음을 빨리 해 해자를 넘어 들어갔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몇 중의 문과 높이 회칠한 벽을 지나야 했다. 하나 하나 한국의 양식과는 다른 옛 건물을 찍으며 느긋하게 지나갔다. 108톤에 달하는 통 돌로 만들어진 벽, 오테구치마스가타의 거석도 지났다. 한 15분쯤 걸었을까? 저 멀리 익숙한, '우리가 아는 오사카성'이 보였다. 오사카 성 천수각이다.
▲우리가 아는 그 오사카성. 오사카성 천수각(天守閣). 성인 600엔. 주유패스 이용시 무료.
천수각을 실제로 보자니 감개무량했다. 이 건물을 동경했다기보단 페이스북에도, 인스타그램에도 천수각 앞에서 밝게 웃는 사진이 올라오는 걸 자주 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첫 일정이 별로 관심이 없던 오사카성이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외국에 나왔구나. 그 사람들처럼 일본 땅을 밟고 서있구나. 그 만족감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해자와 높은 벽, 그 안에 영주가 살던 건물, 봉건시대를 지낸 나라라면 쉽게 보이는 이런 성의 모습은 처음 보다보니, 보는 곳마다 건축양식이 눈에 띄었다. 그 것들을 모두 담으려고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자니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한 무리 두 무리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늦으면 천수각 안에 들어가는데 줄을 길게 설 것 같았기에, 카메라를 끄고 빠르게 천수각 안으로 들어갔다. 계산은 필요가 없었다. 주유패스를 썼으니까.
천수각 안은 8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안은 박물관과 다를 바 없이 구성되어 있었고,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었다. 보통 원형 그대로를 지켜 복원하려는 보통의 문화재양식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솔직히 살짝 실망하는 마음은 들었다. 주유패스가 아니었다면 돈이 아까웠겠다 싶었다. 전국시대 무장들의 생활방식과 복식같은 것이 가득 있었지만, 그런 것을 보려고 외국인 관광객이 천수각에 오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 시대 일본 영주가 살던 내부는 어땠는지를 느끼고 싶은 것이었을 텐데,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더 많은 역사적 정보는 위키피디아를 참조. 이미 지금의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시대의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쉬울 뿐이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8층에 들어서자 그런 불만은 사그라 들었다. 오사카 성 주변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은, 이래서 전망대를 올라오는 구나, 이래서 8층이나 되는 성을 쌓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발 밑에 수많은 인간의 성취를 두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오사카 성 공원의 구석구석이 모두 보이고 저 멀리 우메다로 보이는 곳까지 보이는 청명한 날씨. 살짝의 아쉬움 정도는 천수각 전망으로 날려버릴 수 있었다.
▲천수각 8층 전망대, 공원 내에 있는 야구장이 보인다. 조금 늦게 왔으면 시범경기라도 봤을까?
③ 도시의 역사가 들어있는 오사카 역사박물관
시간이 얼마 안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성 자체가 넓다 보니 1시간 이상 지나있었다. 이제 예정대로 오사카 역사 박물관을 갈 시간이다. 9시 반은 이미 옛저녁에 넘었으니 분명히 열었을 것이다.
다시 역사 가까이에 있는 오사카 역사박물관으로 돌아왔다. 개관은 했지만 아직까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모습이었다. 일단은 국립 역사박물관도 아니고 단순히 '오사카시'의 역사박물관이기 때문에 굳이 가볼 곳이 그렇게 많은데 여기까지 들러야 하나 하고 넘어가는 사람도 꽤 있을 법 했다. 하지만 역사에 관심이 조금만 있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여행지라고 생각한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의 입장료는 600엔이었다. 하지만 역시 주유패스로는 무료. 오늘 관광에 아직까지 패스로만 쓰고 있다는 데 만족하며 관람을 시작했다. 역사 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큐레이터들이었다. 큐레이터들은 모두 백발이 성성하신 노인 분들이었다. 아마 오사카 시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니 만큼 복지 개념으로 노인들께 일자리를 제공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단순히 자원봉사라고 해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백발의 큐레이터들은 젊은이들보다 더 열정적이었다. 그 모습이 배울만하면서도 그저 보기 좋아서 큐레이터 분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오사카 역사박물관의 또 다른 매력, 층마다 전망대가 있어 오사카성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그런 것을 빼고도 충분히 역사박물관으로서 매력을 보이는 곳이었다. 10층부터 6층까지 차례대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오사카의 역사만을 오롯이 담아놓은 것은 충실하면서도 세련됐다. 여러 유물들을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체험형으로 자신이 만져보면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독특한 경험이었다. 여기에 가장 특징적인 것이 마치 민속촌에라도 온 것처럼 실물 크기로 재현된 오사카의 옛 모습들이었다. 일본인이던, 외국인이던, 어리던 늙던 상관없이 오사카의 역사가 궁금하다면 충분히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알찬 구성은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 같이 즐거웠다.
▲영화세트인지, 민속촌인지 모를 충실한 모형들은 역사를 즐기는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게 해준다.
역사박물관을 나오니 어느새 12시가 가까웠다. 아침 내내 느긋하게 움직이는 오사카를 보며, 나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순히 아침 스케줄 만이 아닌 여행시기나 삶까지 말이다. '빠르게, 더 빠르게.' 굉장히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어느새 나도 외국인이 느끼는 전형적인 한국인이 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외국에서 맞는 첫 아침은 내 예상보다 느렸고, 내가 아무리 빠르게 가려해도 강제로 잡아세웠다. 그 덕분에 그 빠른 걸음에도 많은 것을 눈에 담았다. 그 것이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아름답다는 것도 알았다. 일본에 왔다면 일본의 시간에 나를 맞추자. 그것도 재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또 무엇이 있을까, 오후에는 어떤 것을 보게 될까. 여전히 머리는 빠르게 돌고 있다. 아무래도 한 번에 느긋해지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뒤에서 누가 재촉하는 것처럼 급하진 않았다. 이 도시는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것이 많을 것 같았으니까.
▶도움이 되셨다면 돌아가시기 전에 공감버튼 부탁드립니다
'유람사진첩 > [도시촌놈여행기]오사카,도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사카/교토여행]도시촌놈여행기 6. 일본의 미의 이름, 은각사. (2) | 2018.02.19 |
---|---|
[오사카/교토여행]도시촌놈여행기 5. 좀 다른 광경 (0) | 2018.02.15 |
[오사카/교토여행]도시촌놈여행기 4. 오늘이 아니면 다시 없는 (0) | 2018.02.07 |
[오사카/교토여행]도시촌놈 여행기 2. 모든게 다 처음 (0) | 2018.01.29 |
[오사카/교토여행]도시촌놈 여행기 1. 일단 떠나자. 일본 (1) | 2018.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