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에나 흥망성쇠는 있고, 세계화가 되면 될수록 세계는 같은 역사를 걸어왔다. 호황과 불황이 번갈아 일어나고 호황 속에서는 무시해도 될 만큼 잘 산다는 이유로 온갖 추잡하고 무책임한 일들이 쌓이고, 불황이 되면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면서 감당하기 힘든 파도를 만들어낸다.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것이 시대를 몸으로 받아내는 한 개인에게 당연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그 때는 다들 그랬다.’ 고 말해봐도 당연할 수 없다.
우리에게 ‘냉정과 열정 사이’로 유명한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 ‘자차이의 추억’은 ‘그 때는 누구나 그랬다’는 말로 잊혀지는 시대의 부산물과 같은 이들에게 바치는 위로다. 어느 나라가 빛나는 한 때가 없었겠냐마는 일본의 80년대는 그 중에서도 손 꼽는 시기였다. 지금에 와서야 ‘버블경제’라고 말하지만 그 당시의 일본은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많은 서구권의 국가들이 일본을 차세대 경제 발전의 모델로 삼는 시기였다. 돈은 퍼내고 퍼내도 벌렸고, 아무리 써도 동이 나지 않았다. 사람도 없는 시골에 워터파크가 들어서고 면접을 보러 가면 3만엔씩 손에 들려주던 시대.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맛있는 사과일수록 벌레가 꼬일 수 밖에 없다. 노력하지 않아도 몰려오는 자본의 홍수 속에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아.’라는 관념이 자리잡았다. 멋대로 두 집 살림을 들키지 않게 해도 괜찮다. 매일 술과 색욕에 휘말린 파티를 해도 괜찮다. 그저 충동적으로 호텔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도 좋다. ‘그 때는 다들 그랬다’ 단지 작품 내의 과장이 아니다. 그것은 80년대 일본의 현실이었다. 작가가 반복해서 ‘80년대의 일이었다’, ‘80년대는 끝났다’ 라고 강조한 것은 그런 이유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시대가 자본과 충동의 홍수에 휘몰아쳐 흘러나온 부산물 같은 이들이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과 미유키로 대변되는 이들이다. 아버지가 어느 날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어머니는 이혼당하고 금새 내연 관계와 재혼하는 아버지, 어느 순간 생겨난 이복여동생. 어느 하나도 원해서, 선택해서 된 것은 없다. 그저 시대가 했던 것을 따라간 아버지의 행동의 결과였을 뿐이다. 주인공도 미유키도 단순히 아버지의, 시대의 부산물이었을 뿐이다.
이런 처량하고 불편한 것을 자매는 자매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했다. 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시대의 흐름을 타는 것으로 잊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인생을 멋대로 만들어낸 것들을 아무리 따라 해도 불편함이 사라질 수는 없다. 그 행동들은 더 적나라하게 시대의 부산물로서 어떤 저항도 못하고 흘러가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더할 나위 불편하고 허무한 나날이 계속된다. 같은 처지로 같은 행동을 계속하는 서로가 불편하고 혐오스럽다. 80년대의 한 가운데를 살아가는 그들은 서로가 싫은 것이 아닌 그 가운데서도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자기혐오다.
허무한 부산물로서의 삶을 사던 그들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대라면 누구나 하던’ 겉치장 가득한 졸업여행에서였다. 그곳에서도 그들은 그 시대가 그러했듯이 여행서적을 들고 여행을 다녔다. 그러면서도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 일본에서 ‘하던 대로’ 중화요리를 먹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산더미같이 많이 남겨버린 중화요리와 자차이를 만나게 된다. 자신들과 똑 닮은 모습을 가진 자차이를 마주하게 된다.
자차이는 그렇게 많이 나올 이유가 없었다. 단지 식욕을 돋우기 위한 밑반찬인 자차이는 중화요리에 언제나 딸려 나오는 음식이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대가 그랬듯이 뒤를 생각하지 많이 시켜버린 요리들과 함께 그렇게 원하지도 않던 자차이도 잔뜩 나왔다. 누구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차이는 자신도 원치 않게 또한 분에 넘치게 음식들과 나왔다가 음식들과 같이 흘러내려갈 운명이었다.
자매들은 자차이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많이 나오고 싶지 않았음에도 많이 나온 자차이, 그저 다른 음식과 함께 버려질 자차이. 그녀들은 생전 처음 자신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라보게 된 자매에게서 지금껏 느끼던 불쾌감이 아닌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위로다. 너무 닮아서 서로를 불편하게 여겼던 서로에게서 위로를 찾았다. 지금껏 ‘다들 그러니 너도 그렇다’ 라는 이유로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하던 자신의 삶을 자신과 같이 세월에 떠내려가는 위로해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자차이를 모두 먹었다. 외면하던 인생을 받아들였다.
언니, 잘 지내? (お姉さん、元気?)
시대를 잡을 수는 없다. 역행할 수도 없다. 그 가운데 개인의 인생은 언제나 부산물처럼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그 가운데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맘대로 바꿀 수 없이 무력감과 허무감에 젖어 자기를 제대로 비추지도 못하는 이들이 80년대가 아닌 현재 한국에도, 일본에도 살고 있다. 극단적으로 내려앉은 경제, 초등학교 때부터 안정적으로 먹고 살 궁리만 하는 시대. 그 시대에 저항도 못하는 청년들이 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어서 거울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작품을 들려주고 싶다. 너무나도 현재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지만, 자매의 고뇌와 위로는 책장을 넘어 지금과 맞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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