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감시는 사람을 옭아매고 자유를 잃어버리게 한다.’는 주장이나, ‘현대의 빅 데이터, SNS, CCTV는 1984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라는 경고나, ‘인간은 결국 권력의 앞에 무력한가.’하는 의문 같은 것은, 1984를 읽은 사람이라면 한 번씩 할 수 밖에 없는 고민이다. 그것을 훌륭하게 보여준 디스토피아의 명작, 1984를 읽는다면 저런 고민들이 머릿속에 박혀 좀처럼 나 자신의 사유를 놔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럼 그 중 가장 무서운 것을 대보자 어떤 것이 가장 무서운가? 욕망의 거세? 인간의 도구화? 아니면 자발적 감시인가?
2 더하기 2는 4가 아닐 수도 있다. 라는 오브라이언의 주장, 더 나아가 빅브라더와 오스트리아의 주장이 여기 있다. 작 중 오스트리아가 어디까지 개인의 삶을 간섭할 수 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논리이다. 오브라이언이 이 말을 윈스턴에게 계속해서 주입시키는 그 장면에 나는 몸서리 칠 정도로 공포를 느꼈다.
단순히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드는 데 그렇게 무서움을 느낄 요소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 단편적인 물음으로 듣게 된다면 나 또한 전혀 무섭지 않다. 나 또한 이중사고를 하면 그만이고, 그렇게 살아도 어떤 문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그렇게 믿으면 되는 건데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고 무섭겠는가?
하지만, 이를 조금만 확장시켜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존재한다. 나는 이렇게 존재하고, 밥을 먹고, 여기서 이렇게 내 생각을 글로 풀어서 쓰고 있다. 살짝 독후감을 늦게 쓸 수 밖에 없게 된 처지에 자조 섞인 안타까움도 느끼면서 말이다. 나는 최소한 그렇게 믿고 있다.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내 존재가 모두 거짓이 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내가 믿고 있는 이 모든 것이 통 속의 뇌일 수도 있다.
옛 사람 중 이런 질문에 빠져 계속해서 고뇌에 빠진 인물이 있다. 데카르트다. 그는 육신도 감각도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나라는 존재는 과연 존재하는 지 자신에게 수 없이 물었다. 그리고 나온 결론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용구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는 자신의 육신과 감각이 모두 거짓일지라도,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은 바뀌지 않으며, 고로 자신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통 속의 뇌여도 어쨌든 나는 그 곳에 존재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1984로 돌아와보자. 오브라이언이 윈스턴 그리고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기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한 가지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의 말마따나 2 더하기 2는 4가 아닐 수 있다. 이 전제가 이 작품 내에서는 단순히 ‘그렇게 하라’가 아닌 것을 알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목적은 ‘그렇게 하지 말라.’, ‘그렇게 하라.’, 를 넘어서 ‘너는 ~이다’ 로 사람을 규정 짓는다. 2 더하기 2는 4가 아닐 수 있다는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 또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종말의 대사다.
2 더하기 2가 4가 아닌 순간 그렇게 믿고 생각하던 내 모든 과거는 송두리째 의미를 잃고 사라진다. 그렇게 믿고 있던 미래는 불타듯이 사라진다. 2 더하기 2가 4가 아닐 수 있다는 명확한 진실이라 믿었던 것의 불확실성은 곧 그 주위를 맴도는 모든 사건과, 감각, 사유가 다 거짓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해보자. 2 더하기 2가 4가 아닌 순간, 초등학교에서 내가 그것을 배웠던 순간, 중, 고등학교에서 그 진리를 이용해 문제를 풀었던 순간, 동네 슈퍼에서 장을 보던 순간조차 더 이상 그 곳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진리를 이용했던 존재 자체가 없어지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정해진 미래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이 이 책에 빠지고, 이 책이 주는 공포에 도취되고 나서는 얼마나 덧없는 말이 되었는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한 이중사고가 되고, 그 가운데 내가 어느 불순한 맘을 먹고 다시 진리를 말하더라도 그 과거도, 내가 생각했던 모든 것도 나 조차 없던 것으로 생각하는 없던 과거가 된다. 생각하고 있다 하더라도 정말 내가 존재하는지 확인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가 과거부터 현재, 미래에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있을 가치가 있다,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 ‘그 어떤 욕망도 말 할 수 없다’ 같은 것을 문제시 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 1984라는 작품은 2 더하기 2가 4가 아닐 수 있다는 대사 하나로 그런 단순한 걱정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라는 인간, 아니 생물이, 어쩌면 사물로서의 나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도구로서의 인간이라는 잔혹한 상상을 넘어서는 공포다. 더 이상 나는 살 가치를 찾을 수도 없고, 지시한 이상의 무엇을 할 이유조차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세상에 적합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말이다. 하지만 한 번 이렇게 충격적인 공포를 맛보고, 그것이 어쩌면 가능할 수 있을 미래를 생각하면, 그 때가 닥쳤을 때 나는 과연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윈스턴처럼 ‘그를 사랑하는’ 나만이 남지는 않을까? 1984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어두운 미래보다 한층 어두운 심연을 바라보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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