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람사진첩/블라디보스토크 사진첩

밥마샤, 마린스키극장 연해주무대 - 블라디보스토크의 마지막을 장식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실질적인 마지막 날. 

내일 저녁이면 나는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늦은 밤 비행기를 타고 집에 돌아갈 것이다. 7박 8일의 일정이었으니 기념품이나 옷을 챙기다 보면 오전도 금방 지나가겠지. 

오늘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눈에 새길 수 있는 마지막 날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익숙해진 블라디보스토크의 풍경이 다시금 애틋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풍경들이 살살 내 마음을 건드려 결국 이 날은 조금 일찍 브런치를 먹으러 숙소를 나섰다.

숙소 근처에 있던 러시아 가정식 식당, 밥마샤.

어디서 먹을지는 따로 정하지 않았다. 집을 나서며 무엇을 먹을지 얘기하다가

"그래도 한국 가면 다시 못먹어볼만한 걸 먹어야 하지 않아?"

라는 친구의 제안에 자연스럽게 러시아 가정식을 하는 '밥마샤'라는 가게를 찾았다. 

소파, 책, 액자 같은 가구와 소품들이 모두 당장 어느 가정집에 초대받은 기분을 주는 식당이었다.

러시아식 전병인 블린과, 빵으로 덮개를 만든 토마토 스튜가 먼저 나왔다.

뭘 먹자는 계획은 없었다. 그냥 지금까지 먹어본 적 없는 러시아 음식, 그리고 보르쉬. 대충 대여섯 가지의 음식을 시켰다.

먼저 나온 음식은 블린과, 일종의 토마토 스튜였다. 스튜의 이름까지 기억이 났으면 좋겠지만 전혀 기억도 나지 않고, 이 밥마샤라는 식당도 현재 폐업한 것으로 확인해서 음식의 이름을 알 방법이 없다. 참 아쉬울 따름이다.

이렇게 아쉬워하는 이유는, 이 스튜가 정말 진하고 개운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는 점이다. 음식의 이름이라도 알면 집에서 해먹어보고 싶은 그런 바람인데,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이래서 메뉴판도 사진으로 남겨놔야 하는 걸까 싶다.

블린은 그냥 전병이었다. 야채도 들어있고 아침으로 가볍게 먹긴 좋다는 느낌이었다. 뭐 가정식이라는게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지 않은가. 아침에 먹는 된장찌개가 그렇게 특별한 기억으로 안남는 것과 같이. 

하지만 그 흔한 맛이 특별하진 않지만 행복한 기억으로는 남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블린을 먹었다라는 사실만으로 내가 이방인의 경험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러시아인의 경험의 한쪽을 경험한 것 같아 행복했다.

이 후 나온 음식들. 돼지비계로 만든 쌀로, 생선국인 우하, 그리고 솔랸카, 만두인 뺄메니.

이어 나온 음식들도 평범하다면 평범한 음식들이었다. 우하는 모두가 상상하는 생선국, 하지만 상큼하면서도 구수해 술을 많이 마시고 잔 것도 아니지만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고, 솔랸카는 보르시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음식이었다. 굳이 따지면 김치를 뺀 김치찌개 같은 익숙한 맛이었다. 

우하, 솔랸카 어느 것이든 갓 지은 밥만 있으면 푹 말아서 국밥처럼 그릇을 닥닥 긁어 비울 수 있는 맛이었다. 몸이 으슬으슬 시려지면 또 생각이 나는 그런 맛. 그냥 집에 가서 먹고 싶은 그런 평범하고 푸근한 맛이라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벌써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한지 2년이 돼가는데 여전히 가을께가 되면 그때의 솔랸카나 우하를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맛 보여주고 싶다. 평범한 행복은 많이 나누고 싶은 것이 사람 맘인가 보다.

뺄메니는 조금... 평범하게 실망스러운 맛이었다. 만두피가 우리가 아는 만두보다 두껍고, 만두소도 텁텁하고 맹맹해서 고기만두라는 느낌도 덜 들었다. 물론 이곳에 뺄메니를 못 만드는 집일 수도 있으니, 언젠가 러시아에 다시 발을 디딜 땐 꼭 뺄메니 맛집을 찾아 다시 먹어보고 싶다.

브런치를 먹고는 다시 기념품 가게, 주류 상가등을 구경했다. 오늘이 뭘 살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니, 직장에 돌릴 당근크림도 샀고, 가족들에게 줄 화장품들도 샀다. 아무래도 러시아라는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서인지, 보습에 뛰어난 기초화장품이 많았다. 이게 뭐 대단한 효능이 있을까 하다가도 받은 사람은 타국에서 자신을 생각해 가져온 선물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의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해서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줄 수 있게 넉넉하게 당근크림을 챙겼다. 가격도 합리적이기도 했고.

나랑 친구가 먹을 고급 보드카 '벨루가'도 큰 병으로 2병, 면세한도에 맞춰 꽉꽉 담았고, 러시아 하면 떠오르는 털모자 '우샨카'도 샀다. 가방이 터질거 같았지만 이 모든 게 내 여행을 다른 이에게 선물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하니 답 안 나오는 짐가방 정리도 어느 정도 즐거웠다.

졸로토이 대교를 건너 도착한 마린스키극장 연해주무대

짐 정리도 적당히 끝났고 이 날의 일정은 하나 남았다. '마린스키 극장 연해주 무대'에서 클래식 공연을 감상하는 것.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언제나 클래식과 함께였고, 이왕이면 라이브를 듣는 것을 사랑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라이브 공연을 보는 게 한 두 푼이 드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조금이라도 생생하게 보고 싶으면 돈 수십만 원 깨지는 것을 감안을 해야 하니, 사회인이 되면 회원권을 끊어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클래식 공연을 보는 게 내 바람이었다.

그런데, 마린스키극장의 공연 티켓 가격은 최저 150루블(한화 2500원)부터 시작했다. 물론 현장 입석의 개념이었지만, 다른 좌석도 그 정도로 쌌다. 이 돈이면 우리나라에서 공연 세 번은 볼만큼 쌌다.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다른 친구들도 클래식을 어느 정도 즐겨 드든 편이었기에,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사전 예매를 했다. 그것도 가장 프라이빗한 무대 옆 2층 박스석으로! 가장 비싸게 말이다.

극장에서 가장 비싼 박스석도 2400루블. 4만원 정도 한다.

물론 가장 비싼 2층 박스석도 2400루블. 한화로 4만 원이었다. 

기대에 가득 차 티켓 세장을 일찍 가 뽑아두고 느긋하게 로비에 앉아 디저트와 샴페인을 시키고 시간을 보냈다. 디저트는 적당히 맛있었다. 사실 꽤 맛있었을 수도 있다. 그냥 그만큼 블라디보스토크의 디저트들이 맛있었고, 7일이 지나니 입이 거기에 익숙해진 것 같기도 했다.

참, 사람의 즐거움의 역치란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올라간다. 하지만 디저트를 먹으러 온 게 아니라, 엄연히 요 근래 한 번도 못 누린 클래식 공연을 보러 온 거니 귀의 역치는 그대로겠지. 그런 기대 아닌 기대를 하며 공연을 기다렸다. 

정말 무대가 가장 좋은 각도로 보이는 박스석 전경.

2층 박스석은 생각보다 더 무대가 잘 보였다. 지휘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주자들이 서로 어떻게 눈빛을 교환하는지도 보였다. 이 정도로 가깝게 무대를 본 적은 손에 꼽았기에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이 날의 공연은 차이코프스키 콩쿨 수상자들의 갈라쇼였다. 한국인 수상자도 3명인가, 4명 정도 있었다. 모두 우승자는 아니겠지만 훌륭한 성적을 거둔 참가자들임이 분명했다. 콩쿠르 수상자들의 한 곡 한 곡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공연장을 타고 전달되는 떨림은 여전히 그날 밤을 그 해 최고의 보물로 간직되고 있다..

물론 친구들과 처음 앉아본 박스석 안에서의 경험도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다.

누구의 연주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주자의 어떤 주법에서 감동을 받았는지, 곡과 곡 사이마다 작게 이야기를 나눠보며 연주회를 즐기는 건 이런 박스석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물론 모두가 클래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란 점에서 더 특별했다.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그 취향을 공유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감사했고, 이 여행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연주가 끝난 후 마린스키 극장. 여운이 사라지지 않아 오랫동안 서성였다.

훌륭한 연주와 함께 값싼 사치를 누리고 나오니 어느새 블라디보스토크는 늦가을이었다. 선선한 가을날씨는 없어지고 팔짱을 끼고 몸을 비벼야 하는 겨울이 한 두 달 앞서 우리를 반겼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밤은 이렇게 진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란 것이 못내 아쉬워 우리는 극장 앞을 오랫동안 서성였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금 군복을 입고, 클래식이나 고급 요리와는 거리가 먼 초급장교의 생활을 하게 될 것임을 알기에 이 밤이 우리를 잡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2년이 지났고, 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마지막으로 해외 여행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물론 클래식 공연도 다시 가본 적이 없다. 새로운 일상이 좋든 싫든 시작되고 말았으니까. 그래서 못내 마린스키 극장에서의 그날 밤이 더욱 그립다. 괜히 메신저를 열어 그때의 친구를 불러본다.

"그때 너 정말 행복해 보인다" 

또 마린스키 극장에 가서 클래식 공연을 감상하고 싶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