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0시는 되서 눈을 뜬 것 같다. 2019년 9월 2일, 한국을 떠나온지 나흘 째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오늘도 맑았다.
술이라고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 몇 캔이 전부라 취한 것도 아니지만, 어제의 루스키 섬 경험은 많은 피로를 가져다 주었다.
동행한 친구들도 일어나긴 했지만 도저히 이불 밖으로 나올 엄두는 내지 못했다. 두들겨 맞은 것처럼 종아리가 저렸다.
이럴 때는 넷플릭스다. 10시부터 1시가 될 즈음까지 우리는 넷플릭스로 애니메이션을 봤다.
해가 중천에 뜰때까지 러시아의 동쪽 끝자락에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 얼마나 여유로운지. 여행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다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진귀한 여유였다.
어제도 그렇게 돌아다녔으면서, 애니메이션을 두세 편 보고 나니 좀이 쑤셨다. 정확힌 배 속에 좀이 쑤셨다.
뭘 먹을지 심도있는 토론이 이어졌다. 문득 셋째 날이 될 때까지 우리가 러시아다운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러시아 음식을 못먹다니, 러시아에 큰 실례를 저지른 듯한 느낌이 들어 서둘러 나갈 채비를 마쳤다.
여행에서 진지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음식을 먹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동행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본토 음식은 여행의 제1 목적이다. 여유는 러시아 음식을 먹고나서 부려도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좋았던 점이라면, 어느 식당에 가도 관광자보다 현지인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다.
관광객에 맞춰진 국적불명의 음식이 아닌 러시아 사람들이 늘 먹는 그들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로쉬키-쁠로쉬키도 그런 식당이었다. 관광객은 우리를 포함해서 서너팀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러시아 사람으로 보였다.
'그래, 이런 곳이라야 러시아 음식을 먹을 만한 곳이다.'
왜인지 모를 확신을 가지고 러시아 하면 떠오르는 음식과 주변 사람들이 잘 먹는 듯한 음식을 흘긋대며 주문했다.
러시아 말이라고는 하나 둘, 이거 저거 밖에 모르지만 어느새 꽤 음식 주문에 자신이 붙어 뭔지 물어도 보며 시켰다.
뭐 종업원이 해준 말의 절반 이상은 못알아 들었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대답을 듣는 그 시간만으로도 좋았다.
러시아하면 떠오르는 음료수, 체리처럼 빨간 모르스가 먼저 나왔고, 이어서 보르쉬를 앞세워 시킨 음식들이 줄줄이 나왔다. 정말 어느 러시아 가정집에 가면 이렇게 내주지 않을까 싶은 정갈하고 간단한 구성의 음식들이었다.
갓 쪄낸 감자를 육수를 뿌려 내준 매쉬드 포테이토와 막 튀겨 바삭하고 생선 결 사이사이 맛이 살아있는 생선튀김에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어느 곳에 가서도 먹을 수 있겠지만, 이만큼 믿고 먹을 수 있는 맛도 없다.
감탄을 멈추지 못한 것은 보르쉬였다. 야채와 고기가 큼직하게 들어간 푹 끓인 토마토스프. 국물 흥건한 토마토라니, 그다지 좋은 상상이 들진 않았지만, 언제나 음식은 입에 넣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진하게 우려진 보르쉬는 마치 우리의 돼지김치찌개가 연상되듯 정겨운 맛이었다. 물론 맛만 따지면 어떻게 그렇게 비유를 하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가정집에서 야채와 고기를 함께 넣고 맛과 영양이 우러나길 바라며 만드는 음식을 만드는 모양새가 닮았다고 느껴졌다.
같이 먹으라고 주어진 빵은 옛저녁에 다 떨어졌고, 세 명의 남자가 너나 할 것 없이 보르쉬에 매달렸다. 음식을 원래 남기지 않는 편이지만, 보르쉬는 그릇이 뚫릴 정도로 싹싹 비워먹었다.
브런치로 먹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보르쉬. 다시금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고 싶은 이유로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
브런치를 든든하게 먹었다면, 누가 약속하지도 않았지만 카페다.
로쉬키-쁠로쉬키를 나오니 가까운 곳 2층에 눈에 띄게 문을 활짝 열어둔 카페가 있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니지만 저 곳이었다. 그냥 왠지 느낌이 그랬다.
여기 저기 더 맛있는 카페를 찾고, 기가 막힌 러시아 디저트를 먹어보려고 했지만, 딱히 그런 거는 상관 없이 이 카페가 끌렸다.
이름도 모르고, 뭘 팔지도 모르는 카페였지만 아무튼 이 카페가 좋았다. 참 이상하게도 카페가 나를 부르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가는대로 들어간 카페, (구글이 나중에 알려주길 '콘템포카페'라고 한다)
애들 장난치듯 갑자기 들어가고 싶어 들어간 만큼 음식도 그냥 눈에 띄는 걸 골랐다. 음식이야 당연히 먹고 싶은 것 먹는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맥락도 없이 그냥 먹고 싶어서 고르는 것과, 이 곳에서 뭐가 맛있을지 고민하다 끌려서 고르는 것은 다르다. 이날 나는 그냥 말차라떼가 먹고 싶어서 골랐다.
그래도 나름 유럽인데, 커피나 홍차도 아니고 말차라떼라니. 그런데 또 그 언밸런스함이 왠지 또 맘에 들었다.
맛은 그렇게 기억에 남지 않았다. 굳이 생각해보자면 서울 어느 골목에 분위기 괜찮은 카페에서 나올 것 같은 평범한 말차라떼였다. 케잌도 마찬가지였고. 제과제빵을 할 공간도 없으니 어느 곳에서 냉장으로 가져온 디저트가 아닐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실망스럽진 않았다. 여행을 망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평일 오후, 아무도 우리를 알지 못하는 곳 어둑한 카페 한 켠에서 느긋하게 오후가 흘러가는 모습을 본다는 자체가 만족스러웠다.
여행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시간은 오후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동행한 친구들은 트위터를 하기도 하고, 모바일 게임을 하기도 하며, 정말 전형적인 시간보내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이렇게 좋을까. 시간을 보내다 못해 약간은 버리는 것처럼 보여지는 그 여유가 좋았다.
아침은 거르고 늦게 일어나 이국의 땅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보르쉬에 감탄하며 이야기 꽃을 피우다 카페 한 켠에서 창 밖 블라디보스토크를 보다 완전히 동화되어 시간을 보내는 그 게을러 보이는 여유가 좋았다.
이게 여행이지. 이게 여유지. 난 훌륭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이국에서 보내는 여유를 잊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글을 쓰는 지금도 훌륭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매일을 채찍질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하루를 좀 느긋하게 시작한다고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때는 좀 늦어도 된다. 그 때의 블라디보스토크의 오후처럼.
나흘 째의 블라디보스토크의 점심해가 찬란했다.
'유람사진첩 > 블라디보스토크 사진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브이싸따 -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세 남자의 미식기 (1) | 2021.08.26 |
---|---|
연해주국립미술관, 러시아예술가연합 전시관 - 잊었던 미술관을 찾다. (0) | 2021.08.19 |
국립 연해주 박물관, 벨기에펍 - 유럽 속 익숙한 과거와 만나다. (0) | 2020.10.03 |
루스키 섬, 댑버거 - 예상 밖의 일도 있는 법이지 (2) | 2020.08.21 |
독수리전망대 - 하염없이 바라보다 (4) | 2020.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