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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사진첩/블라디보스토크 사진첩

숀켈버거, 중국시장 - 휴식과 낯선 위협, 다시 휴식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다섯 번째 날.

어느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낸 지가 닷새째다. 이번 여행에서 늘 그랬듯, 느지막한 아침을 맞이하고, 넷플릭스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샤워를 하며 어제 사둔 빵을 먹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작은 도시다. 5일이면 밀도 있게 본다면 이미 유명한 것은 다 보고도 남을 도시다. 우리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벗어나 열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옮길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아닌 직장인, 그것도 군인으로 누리는 긴 휴가이다 보니, 조금 더 느긋하게 쉬고 싶었다. 후회는 없었다. 나는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평범하고 조용하게 친구들과의 아침을 맞는다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

내심 하루 종일 집에서 굴러다녀도 좋겠다 싶었지만, 여행자의 시간은 언제나 짧은 편이다. 이제 이틀이면 다시 우리는 직장이자 집인 부대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카메라를 챙기고 문을 나섰다. 이렇게 좋은 날씨, 좋은 도시에서 집에만 있으며 시간을 보낼 수는 없어.

 첸트랄니 쇼핑몰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골목, 아담하게 숀켈버거가 자리하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 아래로 내려오면 꽤 큰 쇼핑몰인 첸트랄니 쇼핑몰이 있다. 우리는 쇼핑몰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고, 또 햄버거에 관심이 생겼다.

솔직히 햄버거는 먹을 만큼 먹었지만, 댑 버거만큼이나 평가가 좋고, 여행서적에서도 추천하던 숀켈 버거의 맛이 너무 궁금해서 이대로 안 먹고 갈 수도 없었다. 그만큼 지금까지 먹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햄버거는 언제나 맛있었다.

숀켈버거의 앞은 경치 좋은 카페를 생각할 때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 같았다.

숀켈 버거는 명성에 비하면 꽤 작은 건물이었다. 사실 블라디보스토크가 어디나 그렇지만 특히나 아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솝우화 같은 동화의 배경이 이렇지 않을까, 선선하고 기분 좋은 햇빛을 맞으며 벤치에 앉아있으니, 새삼스럽게 

'아, 나 정말 잘 쉬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여행에 가서 새벽부터 밤까지 발이 부르트게 돌아다니던 것이 내 '평범한' 여행이었는데, 이번 여행은 정말 느긋하게, 아름다운 일상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라는 사람이 조금 바뀐 것 같았다. 여행 가서 쉰다는 느낌을 받는 게 처음이란 게 여러모로 이상했다. 하지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즐겁다면 몇 배는 즐거웠다.

숀켈버거에서 각자 시킨 모르스와 버거. 빵이 참 특이해보였고, 실제로도 좀 특이했다.

우리에게는 무패행진 중이던 버거의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기대를 가지고 시켰던 숀켈버거는 의외로 내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먹었던 음식 중 가장 맛이 없었다.

물론 이건 내 취향일 수 있지만, 같이 간 2명의 일행이 같은 의견을 낸 거 보면, 명성에 비해서 실망스러운 곳이긴 하다고 지인에게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고기와 소스는 그저 그랬는데, 가장 요리를 망친 건 번이었다. 식빵과 베이글 중간쯤의 느낌인 번은 질깃하면서 소스를 머금고 축축해져 아무리 긍정적으로 먹어볼래도 긍정적으로 먹을 수 없었다.

모르스도 그 전날 먹었던 모르스에 비하면 그저 물탄 주스 같은 느낌. 오로지 주변의 예쁜 경관 때문에 점수를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실망스러운 식사였다.

결국 이날 우리는 밤에 첫날 같던 '새버거', '체푸카 버거나야'를 한 번 더 가서 만족스러운 버거로 이 기억을 잊었다.

괜찮아, 모든 음식이 맛있는 도시는 있을 수 없어.라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이제는 익숙한 택시 승차. 교통 수단이 편해진다는 것이 뿌듯하다.

그래도 배는 채웠다. 오늘의 주 행선지인 '중국시장'으로 향했다.

오늘의 계획은 '곰새우 바비큐'다. 그 맛있다는 북쪽 바다의 곰새우가 너무 궁금했다. 뭐 새우면 새우지, 그렇게까지 먹어보라고 하는 걸까? 

그 답을 알기 위해선 결국 먹어보는 수밖에 없다. 또, 러시아의 시장은 아직 본 적이 없으니까 이 기회에 조금 더 현지 사람들과 섞여서 여행해보자 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첫째 날이나 둘째 날 정도면 걸어가 볼 만도 했는데, 굳이 느긋하게 여행하는데 뭐 힘들게 3-4km를 걸어야 하나 싶어 택시를 잡아탔다.

이제는 꽤 능숙하게 택시를 잡고 택시기사와 이야기를 나눴다. 짧은 러시아어와 영어를 섞어 썼지만 왜인지 낯선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꽤 익숙했다.

내가 이 도시와 정말 많이 가까워졌구나. 어딜 갈 때 걱정을 안 하고 교통수단을 타고 핸드폰을 보고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문득 뿌듯해졌다.

중국시장은 블라디보스토크 어느 곳보다 번화했다.

중국시장은 블라디보스토크 어느 곳보다 번화했다. 지금껏 보지 못한 싱싱한 농수산물과 여러 의류 잡화가 잔뜩. 한국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보던 재래시장 같았다.

평화롭게 곰새우만 사가면 되겠다. 마음 놓고 시장 구경을 하려고 하니, 저 멀리 나보다 머리 반개는 큰 러시아 남자가 걸어와 나를 막아섰다. 짧은 영어로 위협스럽게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이 시장은 촬영 금지고, 내가 언제나 가슴에 달고 있던 액션캠을 당장 압수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사람은 하나고, 우리는 셋이지만 여행객과 이 시장을 꿰뚫고 있어 보이는 남자 중 누가 이 상황에서 유리할진 누구에게 물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겁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 상황에 침착함까지 잃으면 카메라를 뺏기는 것만이 아니라, 더한 일도 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절대 겁먹은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침착하게  '이 카메라는 꺼져있으며, 찍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며 꺼진 화면을 보여줬다. 남자는 자기가 보겠다는 건지, 카메라와 핸드폰을 뺏으려 내놓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괜히 도망가거나 화를 내거나 격한 반응을 보이면 더 자극을 하게 될 것 같아 그 어디에도 아무것도 안 찍혀 있다는 것을 재차 말하고 천천히 가방 깊은 곳으로 카메라와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가볍게 웃음을 머금고 그 자리를 얼른 떴다. 다행히도 그 남자는 우리를 바라보기만 할 뿐 따라오진 않았다. 

익숙한 줄 알았지만 여전히 낯선 곳이었다. 거리가 을씨년스러워보였다.

나중에 들리는 소리로는 중국시장에서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짝퉁, 더 나아가 밀수 관련된 제품도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진짜라면, 정말 위험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등 뒤가 누군가 올라타듯 간지러웠다.

곰새우를 충분히 사고 서둘러 중국시장을 빠져나오니 블라디보스토크 번화가에서 보이지 않던 을씨년스러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버려진 듯한 차들. 깨지고 녹슨 폐가. 대낮이고, 건장한 동행이 2명이 더 있어서 안심하고 걷고 있는 것이지, 혼자 걸어서 돌아가라 하면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5일간 많이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당연히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가에만 익숙했던 것이고, 어쩌면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의 민낯은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다. 여행객은 정말 어딜 가도 여행객이구나. 살짝 허탈하면서도 어쩔 수 없지 싶어 한숨이 나왔다.

곰새우 바베큐는 완전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운이 좋게도 우리 호텔에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바베큐대가 있어서, 처음 호텔에 왔을 때부터 '곰새우 바비큐'를 해 먹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는 곰새우가 얼마나 크고 알이 굵은지 몰라 새우랑 야채를 꿰어 꼬치구이를 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곰새우는 몸통 살만 빼도 손바닥 절반만 한 크기를 자랑한다. 다른 야채를 꽂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인 크기였다. 이렇게 실한 새우를 바비큐 하는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그냥 마트에서 초장(한국과 가까워서 그런지 초장이 마트에 당연한 듯 팔고 있었다.)을 사고 그릴 위에 새우를 그냥 뿌려버렸다. 왜일까, 양념이 없어도 된다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껍질을 벗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벗겨지는 곰새우. 그리고 가을바람 맞는 바베큐.

그 기묘한 확신은 확실히 맞았다. 우리나라의 대하, 중하들과는 다르게 곰새우는 킹크랩에 가까워서 살을 발라내는 게 사실 필요가 없었다. 손으로 툭툭 털면 껍데기가 벗겨지고, 살만 남아 초장에 찍어먹으면 끝이었다. 갑각류 특유의 간도 짭짤하게 배어있어 후추도, 소금도 필요 없었다.

양은 또 얼마나 많은지, 새우를 사서 오후 4시쯤 이르게 먹었는데, 도저히 배불러서 다른 저녁은 생각할 수 없었다. 먹는 것으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다는 군인 셋이서 새우 바비큐를 해 먹고 라면 하나를 더 못 끓여 먹을 만큼 배가 불렀다.

지금까지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와서 후회되는 일이 무엇이 있냐 하면, 곰새우를 중국시장에서 더 많이 사 와 집에 가져가지 못한 점이었다. 공항에 있을 줄 알았는데, 공항에는 좀 작은 곰새우의 아류 같은 새우들(호랑이 새우라고 했던 것 같다)만 팔았고, 맛도 곰새우에 비견할 만하지 못했다. 새우를 좋아하는 부모님께 꼭 드리고 싶었는데,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다음에 갈 땐 꼭 새우를 싸서 한국으로 돌아오리라. 그렇게 다짐할 정도의 경험이었다.

타는 숯 옆에서 새우를 다 먹고 그저 멀리 블라디보스토크 해안가를 쳐다봤다. 바람이 살살 불어왔다. 

주말 하루를 다 버리며 캠핑을 떠나 바비큐를 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이런 느낌이라면, 친한 이들과 함께 짐을 싸서 떠나볼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가 다른 친구들과 캠핑을 해봐야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참 여유로운 가을의 한 자락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참 특별한 여유를 즐기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5일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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