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의 휴식을 마치니 12시가 살짝 넘었다.
미리 봐 두었던 음식점. 올드 패션드에 들어갈 시간이다.
이름과는 다르게 세련된 야외 라운지를 가지고 있는 식당이었다.
햇살이 이보다 좋을 수 없는 날이어서 식당 내부도 궁금했지만 야외 라운지 석을 선택했다.
웨이터가 안내해준 자리는 가장 중앙, 전망 좋은 자리였다.
아침부터 어디 앉지도 않고 계속해서 걸어온 우리에게 가장 맘에 든 것은 역시 의자.
그대로 잘 수도 있을 만큼 푹신한 의자에서 일정 생각도 없이 유리 위로 비치는 우유 탄 듯한 하늘을 만끽했다.
메뉴판은 외국인에게 맞추어 영어와 한국어가 섞인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뭔지 모르면 손짓 발짓을 하며라도 물어보면 되지만, 이런 배려가 있으면 더 좋을 수밖에 없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테이스팅 코스'였다. 정찬 코스보단 다양한 스타일의 음식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코스였다.
양이 적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 뭐 어떤가, 더 시켜 먹으면 된다.
테이스팅 코스의 가격은 1500 루블, 한화 2만 8천 원 정도다.
6코스의 음식이 나오는 것을 고려하면 가성비가 매우 좋은 편이었다.
고민 없이 주문을 넣었다. 여행에서 다른 건 아껴도 식사는 아낄 수 없다.
일행들과 반주로 시킨 칵테일이 먼저 나왔다.
일행들과는 출발 전부터 칵테일바를 찾아 나서던 사람들이라 각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을 시켰다.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은 '갓파더'다.
하지만 언제나 음식점에서는 그들이 가장 자신 있어하는 것을 먹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이름이 '올드패션드'인 바가 있다면 당연히 '올드패션드'를 마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묵직한 목 넘김 뒤로 쌉싸래하고 상큼한 오렌지 향이 넘어왔다. 이름값을 하는 훌륭한 '올드패션드'다.
올드 패션드의 칵테일은 400 루블~500 루블 선이다. 통상적인 한국의 바보다 저렴한 가격에 훌륭한 칵테일을 맛볼 수 있다.
첫 메뉴는 연어 타르타르였다. 메뉴 이름 그대로 연어와 타르타르소스로 약간의 야채로 이루어진 샐러드다.
이 곳에서 계속해서 놀라게 되는 것은 맛보다도 비주얼이었다.
입과 함께 눈이 즐거워질 수 있는 아름다운 식기와 식재료의 대비가 코스를 넘어갈 때마다 새로웠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극히 신선한 연어 위에 잘 버무려진 오일과 소금, 후추, 타르타르의 조화를 새롭게 설명하기가 힘들 뿐이다.
이후 나온 요리들은 전부 독특했다.
첫 메뉴인 연어 타르타르가 생각했던 맛을 부풀려서 즐겁게 했다면, 이후 요리들은 이런 맛도 있구나 싶은 요리들이었다.
스프레드 형식의 '닭 간 페이트'는 순대와 같이 나오는 돼지 간과는 다른 담백하면서도 오래 남는 맛이었다.
'가리비 관자'는 조개관자가 스테이크와 같은 부드러운 육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려주었다.
검은 쌀과 머스터드의 적당한 조화는 가리비의 부드러움 위에 방점을 찍었다.
이 날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에 대한 새로운 충격을 받은 요리였다.
'양고기 스튜'는 다시 메뉴판을 보지 않았으면 끝까지 장조림과 샐러드 중간의 무언가 인 줄 알 뻔했다.
뻑뻑할 것 같은 고기의 비주얼과는 다르게 아주 색다른 고기의 향이 짙게 밀려왔다.
얼마나 오래 졸여낸 것일지 감이 안 잡히는 진하고 농후한 맛이었다.
먹기에 쉬운 맛은 아니었지만, 반주를 두고 있어 최고의 반주 겸 식사가 되었다.
'새우 필라프'는 메뉴에는 없는 요리였다. 한국인들을 위해 맞추어진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크림과 신선하고 쫀득한 새우가 잘 어울렸다. 안 그래도 밥이 필요한 시간이어서 그런가 굉장히 반가웠다.
아쉽게도 요리의 구성이 계속해 색다르고 강한 맛을 보여주어 필라프에선 혀가 지치고 말았다.
러시아어가 유창했다면 메뉴 구성에 대해 진솔한 의견을 내봤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디저트는 그래도 익숙하겠지'라는 생각은 잠시의 텀을 두고 나온 치즈케이크에 의해 무너졌다.
거의 푸딩에 가까운 탄력을 가진 치즈케이크는 쿠키와 석류 푸딩과 어우러져 상큼하면서도 바삭하고 부드러웠다.
더 많은 디저트 메뉴를 먹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경험이었다.
양이 적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완전히 어긋난 생각임을 인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더 이상 다른 식사는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보지 못했던 하늘 아래서 즐거운 대화를 만끽하며 맛봤다는 심리적 포만감까지 가득했다.
역시 여행의 가장 좋은 기억은 테이블에서 나온다. 글을 쓰는 지금도 '올드패션드'에 가 라운지에 앉아 쉬고 싶다.
다음은 얼마나 먹어보지 못한 추억이 다가올지, 러시아 미식에 눈을 뜨는 식사였다.
일행 중 한 명은 1500 루블은 부담스럽다며 500 루블짜리 햄버거를 시켰다. 그리고 그 선택도 정답임을 증명했다.
육즙 가득한 패티와 아끼지 않은 풍성하고 신선한 야채, 전혀 축축해지지 않는 잘 구운 번이 일품이었다.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모든 것이 정답이니 즐기기만 하면 된다.
여행이니까, 만족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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