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광장이 햇빛으로 따가워졌다. 자리를 피할 때가 되었다.
점심을 먹기는 이른 시간이지만, 브런치를 먹기 위해 산책하기엔 아주 좋은 시간이다.
먼저 들른 곳은 가장 규모 있는 혁명광장 기념품샵이지만, 기념품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우리는 거리를 걷는 중이니까 말이다.
혁명광장 기념품샵을 끼고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해안이 따라 보이는 산책로가 나온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으로 빠지는 주 도로중 하나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
하늘이 블루 큐라소보다 맑고 황홀한 색을 자랑하고, 산책하기 좋은 햇살이 몸을 휘감는다.
이런 날씨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만 봐도 즐겁다. 그 이상 눈길을 끄는 것이 없을 때 얘기다.
군 건물을 지나자 마자 큰 잠수함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단순히 전시품인가 싶었더니 내부를 그대로 재현한 박물관이었다.
이런 스타일의 군사 시설 박물관은 이곳저곳에 있지만 그럼에도 2차 대전, 독소전쟁에서 실제 운용된 잠수함 안을 들여본다는 것은 기대가 될 수밖에 없다.
잠수함 박물관의 입장료는 100루블, 가이드북에는 사진 촬영은 50 루블이라고 적혀있었으나 내지 않아도 제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사진 촬영이 50 루블 일 더 드는지도 나오고 나서 알았다.)
잠수함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빛이 들어오지 않는 쇳덩어리만의 쿰쿰한 냄새가 맴돌았다.
그래도 명색이 박물관이니 관람에 방해되지 않게 조명이 밝아 축축한 기분은 떨칠 수 있었다.
내부는 실제로 수병들이 이용했던 객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과 박물관 형식으로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나눠진다.
어느 쪽이 좋냐고 하면 직접 그 당시의 탄흔을 볼 수 있는 그대로를 유지해주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언제 다시 소련의 잠수함과 그 생활상을 볼 수 있을까. 그렇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잠수함 박물관을 빠져나오면 바로 앞에 말 그대로 '붉게 타오르는 별'이 있다.
사상적인 의미가 아니다. 정말 보이는 그대로의 의미가 그렇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가장 작은 랜드마크, '영원의 불꽃'이다.
보통 별 가운데서 불이 타오르고, 그 장소가 러시아라면 사상적인 생각을 먼저 해볼 것이다.
하지만 조용한 성 안드레아 소성당 앞에 놓인 타오르는 별은 엄숙함이 먼저 느껴졌다.
이 영원의 불꽃은 2차 세계대전에서 스러져간 용사들을 위한 추모비다.
지금은 관광객들에겐 대륙 한 구석의 작은 관광지일 뿐이지만 몇십 년 전 이들에게는 지켜내야 할 최후의 항구였으리라.
잠수함과 불꽃, 그 교차점에 있는 성당으로 조용히 아주머니가 들어가셨다.
누구를 향한 기도를 올릴지 자뭇 궁금해졌다.
걷는데 몇 분이 걸렸는지 배가 고파진다. 사실 당연하긴 하다. 시리얼 한 그릇 적당히 먹고 나왔으니 말이다.
바로 주변에 평점이 좋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당초 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어디든 좋았다.
레스토랑이 어디있는지 영 눈에 안 보여서 헤매는 중 화려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사실 레스토랑이 그렇게 눈에 안띄는 곳은 아니었다. 내가 심각하게 길치일 뿐이다.)
개선문다웠고 당연하게도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개선문이었다.
니콜라이 2세가 아직 황태자였던 시절, 블라디보스토크에 방문한 기념으로 지어진 개선문은 생각보다 간소했다.
겉은 꽤 화려했지만 내부 도장은 깔끔한 편이었다. 물론 2003년에 다시 복원된 것임을 감안해도 작고 수수한 편이었다.
꼭 역사에서 배운 검소하고 유약했던 니콜라이 2세의 모습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명령으로 만들어졌다면 그럴만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그 검소함이 마음에 들었다. 주변을 억지로 망가트리지도 않았고 자연과 녹아들어 계단에 앉아서 쉬기 좋았다.
개선문 앞 계단에 기대어 잠시 땀을 식혔다. 조금 더웠다.
가을의 초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시원한 바람과 함께 찰랑거리는 잎 소리가 들렸다.
푸르른 나무와 아파트 대신에 듬성 듬성 늘어서 있는 목조와 벽돌 주택들.
도회지 인파 한 가운데 있는 여행만큼이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조용한 아시아 한구석에서 바람을 맞는 것도 소중하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브런치를 먹으러 가는 잠시간의 시간이 보사노바 리듬과 같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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