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다.
새벽 1시에 도착해서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고 겨우 전철에서 한시간 잤다.
그 후에는 짐을 놓고 해양공원의 정취에 녹아들어 힘든지도 모르고 미친듯이 돌아다녔다.
다시 중심가 아르바트 거리로 돌아오고 나니 막연히 종아리가 얼얼하고 머리가 먹먹했다.
쉬지 않고 몇시간 뛰어다닌 것처럼 마냥 졸립고 무거웠다.
12시까지는 한시간 남짓 남았다.
절실하게 맛있는 디저트가 필요했다. 머리를 행복하게 가동시킬 수 있을 만한.
이왕 첫 디저트이니 실패하고 싶지 않았기에 가이드북을 열심히 뒤적였다.
'르꼼까'라는 이름의 베이커리가 눈에 띄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제과점인 듯 했다.
뭐 사실 업력보다는 실력이지만 오래되었다면 왠지 그래도 신뢰가 간다.
마침 숙소로 올라가는 위치에 있어 잠시 들러서 다리와 머리를 쉬기로 했다. 흥분을 가라앉힐 때다.
러시아 하면 진한 맛의 초콜릿이라는 느낌이 있어 가장 까만 초콜릿 케이크를 시켰다.
'자허토르테'는 아니겠지만 아무튼 철야에 가까운 일정에 다른 무엇보다 좋은 것은 초콜릿이다.
꾸덕해서 포크를 박는데도 힘이 들어가는 케잌을 입에 넣었다. 묵직한 단 맛이 전신에 자극으로 다가왔다.
살짝 덥기까지 한 블라디보스토크의 10월. 맑은 창밖을 보며 에이드와 케잌을 연신 입에 대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지쳤음에도 블라디보스토크의 하늘은 아름답다는 느낌뿐.
숙소에 체크인하고 황급히 몸을 씻었다. 누구라도 할 것 없이 피로를 씻는 일련의 행위였다.
잠시만 자고 저녁을 먹으러 일찌감치 나가자고 약속하고 알람을 맞췄다.
어떻게 잤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일어나보니 저녁노을은 꿈도 못꿀 검푸른 빛의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이미 저녁시간이라고 하기에도 꽤 시간이 지난 밤이 되었다.
이대로 편의점에 잠시 내려가 적당히 사서 먹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첫날이 마무리로는 영 만족스럽지 않다.
그저 무작정 든든한 것을 먹자는 생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밤거리를 나섰다.
아르바트거리로 내려가는 거리는 당연한 말이지만 낮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무법의 스킨헤드를 비롯한 차갑고 위협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의 취기가 도왔는지 낮에는 쌀쌇보이던 이들의 얼굴에는 웃음과 이야기가 가득했다.
여전히 춥지 않은 가을밤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정감있고. 유럽의 얼굴을 쓴 이웃 동네의 모습처럼 푸근했다.
처음에는 그 유명한 '댑버거'를 가려고 했지만 저녁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
댑버거는 한 잔 더 기울이며 마음을 채우려는 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만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저녁이다.
지도에 평가가 좋은 집들을 늘어놓고 보니, 가까운 곳에 햄버거집이 한 군데 더 있었다.
간판에는 작은 검은새가 그려진 버거집. '체푸카 버거나야'였다.
정감가는 작은 가게였다. 주방에서는 계속해서 패티를 굽는 소리와 향이 밀려왔다.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생겼다.
맛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리 말한다. 이 집의 햄버거는 우리가 먹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햄버거 중 가장 맛있는 햄버거였다.
가격은 전체적으로 스몰사이즈(성인 남성이 배부른 양)이 350~400루블이었다.
8000원이 안되는 돈으로 어디서 한국에서는 도저히 먹어볼 수 없는 버거였다.
패티는 육즙이 알알이 밀려들었고, 소스는 진하지만 다른 맛을 해치지 않았다.
번은 쉽사리 젖지 않으면서 고소했으며, 야채는 오늘 바로 구한 것이 분명한 신선함을 자랑했다.
우리는 이 버거를 만남과 동시에 완전히 새로 일어난 기분이었다. 더이상 피곤의 끝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일행이 감탄하며 말한 감상은 지금까지도 깊게 남아있다.
"햄버거의 종주국은 러시아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적지 않은 여행을 했지만 가장 맛있는 버거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다.
우리만 아는(당연히 그렇지 않지만) 비밀 음식점이 생긴 듯한 고양감을 따라 세 맥주잔이 부딪혔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느긋하면서 행복한 추억을 알리는 축배와 같았다.
이후, 우리는 체푸카 버거나야를 두 번 더 방문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면 또 가게 될 것이다.
여행의 시작을 멋있게 장식해준 햄버거 위 작은 검은새에게 건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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