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물에 젖은 솜이불처럼 처지지만 아직 숙소 체크인은 멀다.
그래도 처음 온 블라디보스토크, 첫날부터 쳐져있기에는 시간이 아쉽다.
식사도 든든하게 했으니 피곤하지 않게 산책할 만한 곳을 찾았다.
날씨는 더할나위 없이 완벽했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회화의 한 조각처럼 걸려있었다.
가을이라기엔 살짝 따뜻한 공원 초입에서 레스토랑에서 나온 공연단은 점심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바람을 타고 맑은 바다냄새가 났다. 근해의 비린 냄새가 아닌 쾌청하고 맑은 바다향기였다.
바다를 마주한 공원 한켠에는 장터가 나란히 늘어서있었다. 철제 군용 술통, 파이프 담배, 수제 가죽제품 등이 가득했다.
이곳이 대륙의 동쪽 끝 도시라 해도 광대한 러시아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은 모습 같아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익살스러운 마트료시카가 참 많았다. 특히 장터인 만큼 저작권을 무시한 마트료시카들이 눈에 띄었다.
어딘가 부족한 앵그리버드, 미니언즈가 그려진 마트료시카는 살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수집가들이라면 한 번 둘러볼 수밖에 없을 귀엽고 독특한 모습이었다.
장터에서 눈에 띄었던건 붉은 별로 대표되는 소련의 기념품들과 북한 기념품들이었다.
붉은 별, 낫과 망치. 소련 시대의 디자인은 기념품이라면 당연하게 한 종류씩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회주의라는 것이 우리 입장에선 이렇게 자랑할 것인가 싶으면서도 그들의 거침없었던 소련 시절을 생각하면 자랑스럽게 내놓는 것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매장이 아닌 장터여서 볼 수 있는 기념품은 북한의 지폐나 우표였다. 우리는 넘어갈 수 없는 철책으로 막혀있지만 두 시간 거리의 가까운 유럽에선 북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게 기이한 일이었다.
기념품으론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 재미로 산 기념품이 공항에서 발목을 잡을 생각을 하니 차마 살 수 는 없었다.
해양공원은 산책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산책이란 것은 신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것도 좋지만, 힘든 발걸음이 다른 이들의 일상과 맞물려 사라지기에도 좋다.
관광객보다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시민이 많은 해양공원의 낮은 잔잔한 일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과 발을 맞추고 그들의 생활을 들여다 보면 어느샌가 내 출신까지도 헷갈리는 기묘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곳의 이들과 하나 되는 경험. 내가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경험이자. 산책을 하는 이유다.
해양공원 안쪽으로 점점 더 들어가다보면 갑작스레 큰 관람차를 만나게 된다.
월미도가 생각나게 하는 작고 낡은 유원지가 손님을 맞고 있었다. 물론 손님은 적었다.
남자 셋이서 낡은 유원지에 갈 일은 위험에 가까운 스릴을 맛볼 때뿐이니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소중한 이와 함께 온다면 조금 낡긴 했어도 유원지의 관람차에 탈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우리를 신경쓰지 않을 테니 관람차 위에는 이방인인 나와, 그녀와 이국의 바다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언젠가는 해외여행에서 꼭 관람차를 소중한 이와 타봐야겠다는 설렘 담은 소원을 하게 되었다.
평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해양공원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주민들의 사람내음이 가득했다.
쌀쌀한 가을바다에 몸을 던지는 어린이.
할머니, 어머니에 손에 이끌려 조랑말에 올라타는 아이.
비둘기를 쫓다가 거친 날개짓 소리에 놀라 멋쩍은 웃음을 짓는 아이.
옅고 일상적인 웃음이 머문 얼굴을 보고 있자면 문득 사람 냄새가 난다.
만나는 모든 것이 낯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할아버지 댁에서 누워있으면 은은히 퍼지던 따스한 사람 온기가 가득했다.
발바닥이 피곤해졌다. 사람내음에 적셔져 한동안 더 정처없이 햇빛 사이를 떠다니고도 싶지만, 잠시 앉아야 한다.
돌아가는 발걸음 사이 사이에 음표가 날아붙는다. 길거리 노인 악사들의 연주가 발목을 잡는다.
그들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해양공원의 사람내음이 그들에게 젊음을 선사하는 것인 듯 힘이 있었다.
느릿하고 재지한 서너 명의 노인 악사들을 뒤로하고 해양공원을 빠져나간다.
한국에서 막 도착한 이방인이 해양공원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칠을 하고 나서게 된 듯했다. 남 같지 않은 도시가 되었다.
문득 이번 여행이 관광이 아닌 또 다른 삶이 될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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