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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좋아요' 정말로 내가 생각해보니 '좋아요'


데미안 (Demian)

 헤르만 헤세(에밀 싱클레어) 지음

더 스토리

 295p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 

어느 교육사의 광고용 노래다. 꽤 중독성 있는 멜로디여서 어릴 적 자주 흥얼거렸던 생각이 난다.

그 당시는 당연히 학교를 갈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면 자신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 생각했다. 어른이 되었다면 더욱 더 모든 것을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모습일 것이리라 생각했다. 

사람은 당연히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니까. 그게 당연한 인간이 인간인으로서 가진 섭리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갈 것이리라,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벽 너머 다른 이를 볼 나이가 되어보니, '스스로 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안전하고 편안한 세계에 안주하고 싶고, 스스로 결정하기보단 내게 책임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내 대신 판단해 줬으면 싶다. 그저 남이 말한 것을 긍정하며 적절히 시류를 타고 싶다.

광고에서도 어른들도 내게 '스스로 하는 것'이 좋다고 했으나 되려 세상에서는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하고 올바르고 깨끗했다. 그러나 그 바른 길만을 아무 판단 없이 따라가는 것이 과연 인간이라 불릴 수 있는 길인가 하는 데는 긍정할 수 없었다. 

 '데미안' 속 에밀 싱클레어는 어린 나이 그 간극을 일찌기부터 느끼고 방황했다. 가족들 사이에서 보호받으며 바르게 보이는 '밝은 세계'와 어둡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어두운 세계' 사이에서 싱클레어는 바른 세계에만 속하고 싶었지만, 내면 어딘가에서 자신이 결정해야만 하는 어두운 세계가 자신을 끄는 듯한 느낌을 받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런 싱클레어의 앞에 '데미안'이 등장한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 도저히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혼란스러운 싱클레어에게 도발적인 질문을 한다. '카인은 주체적이고 유능한 이로서 다른 이들이 이를 두려워 해 살인자의 굴레를 씌웠다' 던가, '예수의 옆자리에서 울며 뉘우치던 강도보다 끝까지 자신의 행동에 후회없던 강도가 낫다'던가 하는 질문들이 그것이다. 

이 도발적인 질문들은 싱클레어의 일생을 고민 속으로 빠트린다. 그러곤 데미안은 그 고민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한 싱클레어의 헤엄을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곤 어느 순간 그의 곁에서 훌쩍 떠난다. 싱클레어가 답을 얻었는지 어땠는지는 신경쓰지 않는 듯 말이다.

소설 '데미안'에서 데미안이 나오는 분량은 30% 남짓으로 보인다. 그는 싱클레어의 곁에서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고, 내내 같이 있지도 않는다. 어느 순간 왔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우연 속에서 다시 만나고 종국에는 다시 찾을 수 없게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데미안의 질문들은 싱클레어에게 '스스로 당연하다 여기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했고, 혼자서 그 질문에 답을 하고, 방법을 찾고 그 방법에서 나오는 모순으로 다시금 의문 속으로 빠지게 했다. 데미안은 그 곳에 없었지만, 언제나 삶의 질문의 형태로 싱클레어의 곁에 남아있었다.

싱클레어는 그 질문들에 대해 혼자서 답을 찾기 위해 내면 속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동경의 대상들을 섞어 그것을 닮아보려고도 하며, 의견 교류를 통해 자신의 답을 검증하려고도 한다. 그 방법들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그런 것은 소설 내부에서도 확답하지 못한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싱클레어는 단 한 번도 그 질문을 '당연히 그런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되묻고 의심해야 해.

데미안이 했던 질문들은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옹호할 수도 있고, 반박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옹호나 반박을 하기 위해 그 답을 찾기 위해 입을 연 순간, 우리는 데미안이 된다. '되묻고 의심하는 사람이 된다.'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하는' 인간이 된다. 

이 책은 단언컨데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이렇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인간다운삶을 살 수 있다 말하며 어떻게든 써져있는 삶을 주입시키고 긍정시키려는데 반해 '데미안'은 도발적인 질문들, 싱클레어가 답을 찾아가는 그 청춘의 한 페이지를 읽어가며, 독자 또한 스스로 질문하고 의심하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변하게 하기 때문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태어나려고자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리지 않으면 안된다. 

당연히 그런 것은 없다. 아무리 바른 길로 보이는 것, 모두가 그렇게 하는 것 또한 나름의 이유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며 자기 자신의 답을 찾는 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그저 약육강식, 야생의 세계에서 벗어나 문명으로 접어들었고, 여러 체제를 거치며 더 나은 체제를 선택해왔다. 계속해서 세계를 상대로 투쟁하였으며, 깨트려 왔다. 그렇게 우리는 선조들의 '데미안'적 정신의 토대 위에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데미안을 다시 곱씹을 수록 다시 한 번 지금의 나를 보게 된다. 날이 가면 갈수록 기술의 고도화와 맞물려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는 쉬워졌지만, 그만큼 그저 페이스북 '좋아요'와 함께 남의 생각에 아무런 의심도, 고찰도 없이 긍정하는, 어쩌면 인간으로서 위험한 나를 보게 된다. 

데미안이 내게 묻는다. 그 '좋아요'가 정말로 내가 답을 내린 '좋아요'냐고, 네가 걸어가는 삶이 그저 '바른 것'이 아닌 정말 네가 철저히 투쟁하여 답을 얻어낸 삶이냐고.

나는 오늘도 다시금 투쟁한다. 적은 내 자신이고, 답은 내 의견이다. 당연하다 느끼는 모든 것에 다시금 질문을 할 때,  어딘가에 누르고 말한 '좋아요'가 정말 내가 생각해보니 '좋았던 것'인지, 나는 진정한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오늘도 데미안처럼 생각한다.


초판본 데미안 (양장본)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 이순학역
출판 : 더스토리 2016.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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