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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인문학

일본의 역사구분-역사의 수레바퀴에 따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 아래에 깔린 기본적인 이론을 생각해보면 위의 말은 더 무겁게 다가올 것이다. 역사가 알려준 실수를 잊지 말고 개선하면 그 만큼 미래에 발전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보다 아래에는, 언젠가 역사에 적힌 것이 어떤 형태로듯 다시 수레바퀴가 돌아 앞으로 오듯 마주치게 된다는 하나의 이론이 있다.

생각해보면 단순히 허무맹랑하고 우연으로만 말하는 말이 아니다. 한 민족이 한 지역에서 살아가면 축적해 둔 민족성이라 불리는 그들의 문화와, 그 지역의 지역적 역할, 그 민족을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민족들이 톱니바퀴처럼 엮이면, 어느 하나가 정말 천재지변처럼 이탈해버리지 않는 이상, 잘 짜 맞춰진 역사의 수레바퀴가 완성되는 것이고, 세부적인 모습은 바뀌더라도, 어느 정도의 큰 틀은 반복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면에 있어서, , , 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는 특히 이 수레바퀴가 멋들어지게 만들어질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 , 일 모두가 대륙, 반도, 열도의 지역적 특성을 극단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 곳에 사는 민족들도 큰 변화 없이 민족적 문화를 유지하며 살아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충실하다고 할 정도로 계속해서 주었기 때문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한 예를 들어보자. 필자는 일본의 역사를 역사의 수레바퀴에 맞춰서 시대를 나누고 보려고 한다. 계속해서 굴러가는 수레바퀴 아래에서 일본은 어떤 반복하는 역사가 있는지 알아보면서 그 흐름을 예측해보면서 이 점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알아보자.

먼저, 일본의 큰 수레바퀴의 흐름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본은 섬이라는 지형적인 특성으로 상대적으로 늦게, 그리고 한 번에 많은 양의 선진문화와 제도가 들어오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충격에 가까운 대유입이 일어나고 나면, 그 충격의 여파일까, 받아들일 만큼 받아들였다고 생각해서일까, 급격히 다른 나라와의 접촉을 줄이고 스스로 갈라파고스화 되어 받아들인 문화와 제도를 어디서 찾기 힘든 독특한 형태의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 후, 잠시의 평화기가 지나면서 스스로만의 문화와 제도가 가진 부작용을 개선할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하고 곪아 크고 작은 전쟁으로 그 때까지의 문화와 제도를 순식간에 환기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든다. 모든 전쟁이 끝나면 불만이 수그러들고, 곪은 문화와 제도를 걷어낸다. 그 위에 다시 충격에 가까운 문화의 유입이 시작된다. 이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의 중요도와 영토가 커지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요약해보면 일본은 문화/제도의 대유입- 교류의 감소, 안정, 갈라파고스화- 부패와 전쟁이 반복되며 영토의 확장/세계에서의 중요도 증가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큰 수레바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일본의 처음부터 이 수레바퀴를 기본으로 바라보며 가보자.


① 형성기

일본의 역사의 수레바퀴의 시작은 야요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자생적인 청동기 문화를 가지고 있는 다른 문명과는 달리, 일본은 첫 청동기 문화부터 기존의 신석기(조몬) 문화를 가진 원주민들 사이에 한반도로부터 청동기/철기 문화를 가진 이주민들이 도래하며 시작했다. 다량의 문화가 급속도로 들어온 첫 지점으로 꼽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시기다.

▲야요이시대의 전형적인 주거 양식

이후로도 4세기가 되는 동안, 한반도에서 수많은 도래인과 함께 불교와 유학, 한자가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다른 문명보다 한 발 늦게, 하지만 순식간에 문화다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이른바 아스카 문화를 만들고, 중국과의 접촉도 직접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바다로 막힌 일본이 중국과 교섭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왕권은 강화되며 평화로워 보였지만, 귀족과 세력가들의 영지 수탈과 같은 야요이 시대부터 곪아가던 것은 계속해 쌓이다 쇼토쿠 태자 사후, 소가씨()로 대표되는 이 전횡은 나카노오에의 쿠데타로 갈아엎어지게 되었다. 나카노오에는 다시 한 번 갈려진 일본이라는 토양에 당의 율령과 관료제를 본받아 다이카 개신을 추진하게 된다. 그 중에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한 원군을 대거 보냈다 백촌강 전투에서 참패를 겪은 나카노오에는 곧 산성을 쌓으며 국방을 다지고, 망명한 백제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제도를 정비하며 덴지덴노로 즉위하고, 임신의 난을 정리하며 즉위한 후임 덴무덴노는 율령을 반포하며 공식적/국제적인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비를 마치게 된다.

이렇게 청동기 시대부터 천천히 만들어지던 일본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스카시대에 이르러 문화를 받아들이고, 변형하다, 곪고, 전쟁으로 다시 시작하는 형태를 완성한다. 이 수레바퀴는 곧 이은 나라시대 다시 한 번 돌아가기 시작한다.


② 고착기

이후 일본의 역사의 수레바퀴는 점점 더 전형적인 모습으로 바뀌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다이카개신 이후로, 덴지, 덴무가 일궈낸 중앙집권국가 일본은 확장된 국가와, 발전된 기술을 토대로 당의 제도를 순식간에 다량으로 들여와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나라의 헤이조이며, , 나라시대의 개막이다. 나라시대가 개막하고 일본은 정말로 당의 거의 모든 것을 베꼈다 해도 좋을 정도로 할 수 있는 만큼 당의 문물을 충실히 수입하고, 모방했다.

하지만, 부작용은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빨리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급하고 무분별한 당제의 정책들은 일본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였고, 50년을 버티지 못하고 변질되기 시작했다. 말로는 토지의 국유화였지만, 현실은 묘슈들이 땅을 나눠 가지며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관료제를 기반으로 하는 중앙집권을 외쳤지만, 현실은 다이카개신의 주역인 후지와라씨()를 필두로 한 귀족들이 주인공인 관료제 아닌 관료제였다.

결국 덴노는 귀족들의 힘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위치로 곤두박질 치게 되었고, 후지와라씨는 덴노를 가지고 내분을 거듭하여, 헤이안쿄로 천도하게 된다. 헤이안시대는 결국 나라시대에 다량으로 빠르게 들여온 외래문화, 제도가 다른 문화, 제도로도 자구책으로도 개선하지 못한 채 악화되어가는 동안 도래한 시기였던 것이다.

헤이안시대가 되고 나서 악화는 계속되어, 조세는 개선되지 않은 채 날이 갈수록 무거워져 농민들이 조세, 병역, 노역을 피해 도망가게 되었고, 이는 징병을 포기하게 되고, 귀족들의 사병이 늘어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버려진 땅은 지방 호족들의 차지가 되었고, 땅을 버린 농민들은 호족들의 아래에서 경작을 하며 벌어먹고 살게 되었다. 아시아에서 유래가 없는 일본만의 장원제도가 정말로 갈라파고스 섬의 동물들처럼 나타나게 된 것이다.

▲헤이안시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특이계층, '사무라이'

이후 또 다른 갈라파고스의 생물과 같은 사병 조직사무라이가 점점 세를 얻으며, 후지와라씨를 몰아내고 미나모토를 주역으로 막부를 차리게 된다. 이가 가마쿠라 막부이다. 하지만, 평화를 되찾은 듯 보였지만, 결국 헤이안에서 변한 것은 거의 없이 잠시 다른 체제로 환기되어 버티던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의 몰락에 불을 당기고 남북조를 거치며 무로마치 막부로 나아가는 수 차례의 내전을 거치게 된다.

무로마치 막부는 이전과는 달리, 명과의 무역으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며 분위기를 환기하려 노력했다. 이는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것처럼 보였지만, 제도적으로는 별 다를 바 없이 흘러갔고, 만족하지 못한 사무라이들은 해마다 거병하기 시작했으며, 완전히 다른 흐름을 원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흐름은 더욱 더 심화된 내전인 전국시대를 열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서는 더욱 더 많은 말을 쓸 수 있지만, 지금의 수레바퀴 안에서 보면, 결국, 나라, 헤이안의 뒤로 막부라는 이름으로 갈아엎어보려 했던 가마쿠라, 무로마치까지 곪았다 갈아엎어지다를 반복하던 모든 것이 결국, 전국시대라는 피 흘리는 내전과, 동아시아를 송두리째 흔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마무리 되게 된다. 이후 에도막부가 열리며, 영토는 한껏 넓어지고, 일본은 더 무거운 존재감을 조선과 명에게 안기고 국제 사회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야말로 틀처럼 딱 맞춰진 수레바퀴의 형태를 만들어 낸 것이다.

③ 급진기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일본의 역사를 돌리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명과 조선, 그리고 유럽 문명에서 다시 한 번 수많은 문화를 수입하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일본 내부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그 또한 잠깐, 이 시기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이 들여온 그리스도교는 에도 막부가 다시 한 번 그들의 수레바퀴와 똑같은 길을 가게 만들었다. 그리스도교가 덴노와, 쇼군의 정치와는 맞지 않다 생각한 그들은 문을 걸어 잠그게 되었고, 그 당시 세계에서 또 다시 없는 막번제도로 영주들을 예속하며, 평화를 도모하면서, 다시 한 번 스스로 갈라파고스가 되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안 보겠다고 안 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기술과 서민들의 의식은 막부에서 막고 예속하는 것으로 막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레바퀴는 예전처럼 느리게 돌지 않았다. 도시는 발달했고, 죠닌의 성장으로 자본주의와 같은 형태가 일본에 점점 침입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를 닮아가는 경제체제 아래에서 아무리 농민들에게 세금을 걷어도 근본을 바꾸지 않는 막부의 재정이 악화되는 것은 당연했고, 이를 개선할 만한 것을 외부에서 찾아와야했지만, 한 번 걸어 잠근 문은 이번에도 쉽게 열리지 않고, 악화되어가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던 쇼군, 요시무네의 해결방안은, 사상통제에 가까운 긴축과, 수구적인 조세변화였다. 결국 농민들의 삶은 더욱 더 힘들어졌고, 일말의 창조의 여지도 없어진 에도 막부는 겉으로만 안정될 뿐, 해결되지 않는 늪에 빠졌다.

유럽부터 밀려오는 변화의 파도는 갈라파고스화 되려는 일본을 가만두지 않았다.

문을 잠근다고, 창문이 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철문만 세워두고, 서구를 막아보겠다던 에도 막부는 페리의 포함외교에 굴복하고 문호를 개방했다. 이미 재정적으로도, 민심으로도 나아지는 것 없이 악화만 되고 있던 에도 막부에게 포함은 거부할 수 없는 압박이었고, 이를 수락하고 조금이라도 더 연명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지금까지 쌓아왔던 불만을 터트리는 기폭제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나마 외세의 위협에서 지켜준다라는 인식으로 버티고 있던 막부와 쇼군에 대한 권위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통제만 하고, 경제가 나아지지도 않고, 그 와중에 외세에 굴복까지 해 지킬 힘 조차 없는 막부에게 권위를 줄 영주와, 서민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다시 한 번 가마쿠라 말기와 무로마치에 일어나기 시작한 내전처럼 일본은 남북조 시대가 생각나는 내전을 시작했다. 소가씨가 무너지고, 후지와라씨가 무너지고, 헤이안이 무너지고, 가마쿠라가 무너졌듯, 사실상 이미 곪을 대로 곪아버린 막부는 버텨낼 수 없었고, 존황양이의 기치를 든, 서구의 문명을 잔뜩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무라이들은 메이지 덴노와 함께 새 시대를 열었다.

이미 이것만 해도 수레바퀴는 한 바퀴를 돌았지만, 바퀴는 멈추지 않고 더 빠르게 돌았다. 이제는 서구의 문명을 직접적으로 또다시 단기간에 다량으로 빨아들인 일본은 성공적으로 유신을 단행했고, 동아시아 3국 중 가장 먼저, 성공적으로 서구화, 산업화를 도입했다. 하지만, 그 속도만큼 일본은 빨리 변질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유교적이고 수구적인, 그리고 군사위주의 문화에 서구의 제국주의가 위로부터 강제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니 결국 극단적 군국주의로 순식간에 변질 될 수 밖에 없었다. 역시 겉으로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고 평화로웠지만, 이미 정권의 칼자루는 정부에게서 군부에게 옮겨진 상황이었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1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전쟁으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무모한 생각에 붙들려 과거 자신들이 문명을 받아들이던 원천이던 국가들을 식민지화 시키며 나아가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곪아버린 근대 일본은 예전 같았으면 수백년만에 천천히 돌아서 만났을 다 곪은 수포를 다시 시작할 전쟁에서 직면하고 말았다. 2차 세계대전이다. 그리고, 당연히 역사가 지금껏 가르쳤던 것처럼 지금껏 권력을 쥐고 곪아가던 것을 버티지 못하던 일본은 그 빨랐던 속도만큼이나 큰 피해를 입으며 근대의 막을 내리게 됐다. 폐허 속에서 새 시대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도입-변질-전쟁으로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통해 일본의 역사를 나눠보았다. 하나의 역사적 틀을 만든 형성기, 완벽하게 정형화 되어 느릿하게 흘러간 고착기, 세계화로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 급진기로 크게 세 시대로 나눠 구분해보았다.  일본은 벌써 버블경제의 붕괴와 같은 다시 한 번 곪은 것이 바뀌는 격변을 현대에도 계속해서 겪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지만, 점점 기술의 진보와, 세계화에 따라 적응하기도 힘들 정도로 빨라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일본은 아직 대처를 잘 하지 못한 것 같다. 지금의 시기를 봐서는, 아베 신조의 경제 정책을 비롯한 정책이 에도 막부가 타개하기 위해 쓰던, 자신으로선 어쩔 수 없다지만 곪아서 터지는 것을 가속화 시키던 그 정책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우리의 역사의 수레바퀴라고 느리게 돌고 있을리가 없다. 현대에 들어선 한국의 역사는 짧은 현대사 안에서만 몇 번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 그 가운데 일본을 모방해 현대를 꾸린 만큼 우리의 역사의 수레바퀴에 일본의 과거를 덮어씌우고 있다. 몇 번의 정치권력의 실패와 민초로부터 일어나는 정권교체'일본의 10년 전은 한국의 현재'라고 불릴만큼 맞물려 돌아가는 한일구도와 현대사.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조금이라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나은 쪽으로 굴러가게 할 능력이 있으며, 힘든 시기가 오지 않도록 만들 사명 또한 있다.


역사는 현대적으로 더 빠르게 반복된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역사 교육이 중시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고 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잊지만 말 것이 아니라, 역사가 보여주는 미래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단지 이번은 지났으니 괜찮다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역사를 기억만 하고 역사의 경고는 무시한다면, 우리는 또 다시 무척 빠른 시일내에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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