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얘기에 앞서 표지를 한 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떤 작품이라고 생각이 드는가? 이 작품을 보지 않은 이라면 어린 두 소년소녀가 장대한 세상을 향해 모험을 떠나는 내용, 혹은 서툰 우정이 싹트는 내용일 것이라고 백이면 백이 대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내가 꽤 인상깊게 감상한 작품임에도 글을 쓰는 지금까지 자신있게 추천하기엔 힘든 문제작이다. 희망적이고 활기찬 대모험을 그린 겉표지와는 다르게 작품은 내내 과한 폭력과 정신적 학대를 밀도 높게 보여주고 있다.
이 밀도 높은 폭력/학대묘사는 죄 없고 어린 주인공 리코 무리에게 당연하게도 과하게 집중되어 한치 앞을 모르는 주인공의 행보에 자연스래 이입하는 독자와 시청자조차 본인이 학대를 당한다고 느끼게 만든다.이는 '메이드 인 어비스'의 강점이면서도 누군가에게 자신있게 추천할 수 없는 문제작인 이유다.
그러나 문제작이 자신의 문제적 요소를 뒷받침할 묵직한 물음을 가진다면 이는 그저 단순한 문제작으로 볼 수는 없게 된다. 예를 든다면 '도전에 대한 긍정'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묻는다면 어떻게 될까? 단순히 어린 아이마냥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가치 뒤에 외면받던 점을 들춰보자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위해 도전한다. 그것이 개인의 성공이건 행복이건, 어찌되었던 명확한 목표점은 없더라도 지향하는 가치는 있으며 그 가치를 위해 부던히 노력하며 도전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 끝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받으며 스스로를 정의한다. '인간은 끝없이 도전하고, 넘어지면서 성장하는 아름다운 존재'라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은 너나할것 없이 모두 최선을 다해 도전을 하고 있다. '어비스'라는 끝모르고 꺼져있는 구멍은 그 자체로 미지의 공포와 함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는 주인공인 리코와 레그 뿐 아닌, 수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어비스의 끝을 보기 위해 도전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이라 해도 말이다.
찬사를 받을 일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전을 하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다시 묻는다. 레일에서 벗어난 도전을 계속하는 데는 가치가 있는가?
길가는 이를 잡고 이렇게 물어본다면 당연하게도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니라 대답할 것이다. 당연하다. 대개의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할 정도의 악인은 아닐 것이니까. 이 작품의 으뜸가는 악인인 본도르드 같이 자신의 도전을 위해 수많은 인간을 희생시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레일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이 '아마도'는 작품이 연재되는 내내 독자와 시청자에게 주는 불안감이다. 모두가 본도르드같은 악인은 되지 않겠지만, 그정도의 희생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도전할 수 없는 곳이 작품에서 묘사하는 '어비스'다.
끝내 어비스의 끝을 향해 도전한 '하얀호각' 들은 본도르드를 비롯해 모두 자신의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도전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주인공인 리코의 어머니, 라이자 또한 사실상 딸을 버리고 끝없는 도전을 향해 나아갔다. 다른 하얀 호각인 '오젠'은 사실상 인간을 포기한 수준으로 자신의 육체를 변형시켰다. 그리고 이런 대가를 원하는 어비스의 아래로 주인공인 리코는 계속해서 내려간다.
독자는 이런 상황 가운데 리코가 레일을 벗어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거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누구를 해치지 않더라도 그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할 것 같다는 불안감은 작품의 특징인 폭력/학대묘사와 합쳐져 극대화된다. 그리고 그렇게까지나 리코의 도전이 값어치 있는 일인지 의문감을 가진다. 도전이라는 것이 정말로 언제나 박수받을 일인가?
작년 우리나라에선 과로사가 200명이 넘었다. 이는 단순히 '과로사'만 따진 것이고, 과로로 인한 자살, 과로로 인한 졸음운전 등 통계 집계하기 힘든 과로는 이 수치를 훌쩍 넘는다. 주 근로시간을 줄이고, 워라밸을 신경쓰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중 누군가는 찬사받는 도전의 삶, 성공의 삶을 위해 오늘도 자신의 가장 가치있는 무언가를 희생한다.
뉴스에 나올만한 악랄한 희생은 아닐 것이다. 그 정도로 레일을 벗어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치있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땔감으로 삼는 도전신화, 성공신화가 모든 이들의 모범으로 찬사받아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은 바로 방금 물어본 질문처럼 쉽게 답하긴 힘들 것이리라.
아직 '메이드 인 어비스'는 한창 연재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 애니메이션 연재도 다시 시작할 것임을 알렸다. 작품이 이런 파멸적인 도전에 대해 어떤 견해를 보일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질문은 이미 던져졌다. 주인공인 리코가 어떤 길을 선택할지를 지켜봄과 동시에 우리는 답을 계속 고민해야 할 것이다.
어비스는 리코에게 그 희생을 감수할 만한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우리의 '어비스'라 생각했던 가치는 당신의 다른 가치들을 희생할 만큼 엄청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허한 사회의 찬사에 낚여 전력을 다해 도전하며 정말 필요한 가치를 희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작은 오늘도 묵직하게 묻는다.
당신의 삶의 다른 가치들을 던져넣을 만큼 현재의 도전이 아름답고 가치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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