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던, 드라마던 영화던, 보다보면 영 집중을 할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주인공은 사람이라고 보기도 힘든 능력을 가지고 비웃듯 자신만의 고뇌를 자랑한다. 실은 어떤 한가지도 부족함이 없고, 미래도 보장된 수준의 사람들이면서 자신은 자신만의 고뇌를 가진 불행한 사람으로 분장한다.
그들은 우리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들이다. 그들의 어떤 고민도, 행동도 진정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이 잠시의 대리만족이 될 뿐, 모니터를 끄고 나서 느껴지는 자괴감은 배가 되어 돌아온다. 그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
'하이큐' 또한 언뜻 보기에는 그런 류의 작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작품 역시 다른 부족함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배구에 생사가 달린 듯 달려드는 10대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야기다. 그러나 하이큐는 어디 하나 거슬리지 않고 계속 즐겁게 보게 된다. 오히려 글을 쓰는 지금에 와선 '하이큐'의 많은 대사와 장면들이 나를 계속해서 고무시키고 있을만큼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왜일까? 그들도 단지 공놀이를 하고 있을 뿐인 부족함 없는 어린아이들인데 말이다.
고작 블록 한 번. 고작 25점 중에 1점. 고작 부활동.
가장 큰 차별점은 그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목숨 걸듯 모든 것을 바치는 배구가 어느 순간 끝난다는 것을 처절하게 인지한다는 점이다. 이들 세계는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
아무리 연출이 기가 막히고, 대단해보여도, 프로선수에 미칠 재능과 센스를 가진 이는 극히 소수다. 나머지는 '취미로서 배구'를 하는 것이고, 학창시절이 끝나는 것은 곧 자신의 배구인생도 멈추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현실을 인지하는 캐릭터가 한 둘이 아닌 여럿, 특히 팀의 뼈대를 맡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선수들은 누구나 그렇기에 이 작품은 줄곧 부활동으로서 배구를 보여주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순히 '저 선수는 얼마나 대단한 플레이를 보여줄까'를 궁금해 하는 것 뿐만이 아닌 다른 물음을 모든 인물들에게 하게 된다.
'그저 부활동인 배구가 저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인지, 캐릭터들 하나 하나가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하이큐'는 계속해서 주인공 뿐만이 아닌, 코트 안 주전들만이 아닌 모든 이들에게 그 이유를 몸소 증명하게 한다.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주인공을 질투하는 상대팀 선수들, 처절하게 패해 다시 못 설 코트를 떠나는 고3 선수들, 잘하는 것 하나 없이 친구가 좋아 배구에 온 만년 벤치 선수.
보통의 작품이라면 이야기의 낭비라 생각해 조명도 비춰지지 않을 이들에게 이 작품은 최대한 많은 공간을 할애하고, 인물들은 그들이 단순한 공놀이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각인시킨다.
날개가 없기에 사람은 나는 법을 찾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스포츠로서 배구를 하는 것도, 부활동으로서 배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순간이라도 더 날기 위해, 네트 너머를 볼 기회를 손에 쥐기 위해서였다. 다시 오지 않을 고등학생 시절의 부활동,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들의 삶 속에서, 아무리 절망해 추락해도 다시 날개짓할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었다.
이 모습이 비단 재능과 센스가 부족한 인물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작품 모든 인물에게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모두가 인정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처절하게 실패하고 아래로 추락한다. 그렇기에 재능을 가진 이들이 일반적인 이들은 이해 못할 자신만의 불행을 겪는 것이 아닌 똑같은 고민, 한 순간이라도 날아 오르기 위한 갈망을 가진다. '재능은 꽃 피우는 것, 센스는 갈고 닦는 것'이라 되뇌며.
배구공은 그들의 바램처럼 땅에 떨어지지 않고 계속 떠오른다.
공이 땅에 닿는 순간이 마침내 지는 순간이기에, 아무리 추하게 보여도 떨어지는 공을 걷어내고 다시 연결하고, 다시 공을 꽂아넣는 그들의 모습은 그들이 단순히 배구를 하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인생을 이겨내는 방법을 찾아가는 순간들이었다.
공이 바닥에 닿지 않는다면, 부저가 울리지 않는다면, 단 한번이라도 공이 내게 날아오른다면, 언제라도 다시 날개짓을 할 수 있으니까.
그들의 능력 여하를 막론한 성취를 향한 갈망은 그들이 배구가 아니더라도, 배구를 그만둔 미래에서도 분명히 네트 너머에서 넘어올 공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며, 현실의 우리를 잡고 흔든다.
'포기의 세대'. 얼마 전 신문에서 구직단념자가 45만명을 넘었고, 그냥 이유없이 쉬는 사람들도 12개월째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무리 날려고 노력해도 날 수 없는, '날지 못하는 까마귀'가 된 이들이 공원에 보이는 비둘기만큼이나 많은 것 같다.
물론 그 것이 우리 세대의 잘못은 아니다.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곪아 터지고 있는 지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날개가 꺾인 채 자신의 발만 보며 걷는다면 자신에게 돌아오는 배구공을 그대로 놓치고도 놓친지 모르고 그렇게 더 이상 꿈꾸지 못하는 채, 작은 성취도 맛보지 못한채 삶을 후회 속으로 흘리고 말 것이다.
아래를 내려보지 마! 배구는 언제나 위를 보는 스포츠다!
내 삶의 이정표 중 하나가 된 '하이큐'의 대사다. 나는 아까운 10대의 시절을 아래만 내려보며 만족하고 살았다. 그럴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주변 환경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결론적으로 나에게 네트를 넘어 돌아오는 기회조차 보지 못하고 그렇게 10대를 흘려버렸다.
다시는 그렇게 후회하고 싶지 않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렇게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어떤 시궁창에서라도, 다시 떨어질지라도 1cm라도 위에 있는 가지로 날아 올라가는 새가 되었으면 좋겠다.
배구공은 언젠가 나에게 다시 날아오리라. 이런 시궁창같은 사회에서도 다시 튕겨 돌아오는 배구공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구공을 향해 날개짓 할 수 있게 준비하리라. 내 모든 실패와 사회의 벽을 부술 힘을 담고.
당신의 날개도 아직 꺾이지 않았다.
가라, 가라, 가라. 그 절망의 기억을 부숴라
[하이큐의 5번째 오프닝 영상,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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