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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공연

기대와는 다른 '키다리 아저씨'

자, 여기 뮤지컬이 있어. 수많은 세월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은 소설을 가지고 만들어진 뮤지컬이야. 당연히 대극장이여야 할테고, 화려한 무대장치의 많은 훌륭한 배우들이 세련되고 스케일 큰 노래를 가지고 온갖 무용을 선보이겠지. 

그 원작이 수많은 이들을 설레게 한 '키다리 아저씨'인데 말이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수십년 간 다져온 뮤지컬에 대한 기대감은 하나의 큰 성과 같으니까. 당연히 기대도 그 성만큼이나 한 보따리 챙겨서 가게 되지.

그런 의미에서 '키다리아저씨'는 그런 한 보따리의 기대를 가지고 갔다가는 많이 혼란스러울지도 몰라. 기대를 아예 하지 말고 가야 하는 공연이란 건 아니야. 그런 기대를 잔뜩 챙겨갔다가 환호가 뒤섞인 충격을 받는거지. 

이 뮤지컬은 많은 것이 지금까지의 한아름의 기대치에는 미치지는 못해. 아담한 중형 극장에서 열리고, 무대는 전환 없이 단 하나. 어떻게 듣자면 단조롭고 심심한 노래를 가지고 자연스러운 제스쳐를 취할 뿐이야. 

심지어 배우는 단 두 명이야. 제르비스 펜들턴과, 제루샤 에보트. 이 정도면 어느 이들은 그게 뮤지컬이라 불릴 수는 있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 모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이 공연에서는 할 수 있는 만큼 아름답게 완성시켜 놓았어. 

아담한 중형 극장은 원작 '키다리 아저씨'가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인 한 여대생의 편지를 읽는 그 조용하면서도 비밀스러운, 깃펜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마치 옆에서 들릴 것 같던 특징을 가장 콕 찝어서 살려냈어. 

가장 뒷좌석에도 배우들의 모든 것이 보이고 배우는 관객과 직접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하지. 제루샤가 소곤거릴 때는 관객도 같이 숨을 죽이게 되는 반응들은 다른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는, 편지 속에 녹아드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야.

또, 단조하고 심심한 노래는 어떤 이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겠지만 또 가장 큰 특징이 될 수 있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OST앨범을 노래가 맘에 들어 사고 싶다는 생각은 안들었어. 2시간의 러닝타임동안 제루샤와 제르비스의 테마가 계속 변주되면서 두 세 곡의 강조점만 다른 노래를 통해 눌러놓은 OST는 그렇게 흥미를 끌 만한 거리를 주지는 않았지. 

하지만 그와 반대로 OST만 틀어두더라도 뮤지컬을 그대로 다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고 싶다는 생각 역시 들었어. 이 노래들은 단순히 한 장면을 극단적으로 줌업해서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 노래들이 작 중 내내 끊기지 않고 이어지면서 모든 감정선을 대화가 아닌, 지저귀는 듯한 노래로 변환했지. 

편지라는 특성에도,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라는 특성에도 아주 잘 부합하면서 마치 미니어처를 세세하게 보여주는 느낌으로 다가와. 역동적이진 않지만 그 자체로 정취에 푹 파뭍이기에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해.

무대연출 또한 전환 없이 단 하나의 무대로만 어느 정도로 효율적으로 연출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줬다고 생각해. 

시종일관 제루샤는 입장할 때 관객석에서 무대로 올라가고, 제르비스는 무대 뒤에서 앞으로 나타나지. 그리고 영역을 극단적으로 나누어 제르비스와 제루샤의 세상이 서로 이해하기 힘들고, 아예 판이하게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줘.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제르비스의 영역에는 제루샤의 편지가 기억의 단편처럼 가득 채워지고, 제르비스는 자신이 평생 이해하지 않을 수도 있던 제루샤의 영역에 관심을 보이고 점점 자신을 그 가운데 집어넣지. 제루샤 또한 후반으로 다다를수록 제르비스의 영역에 발을 옮기려는 어려운 일을 시도하기도 하고. 

무대는 단 하나지만, 영역이 명확하게 분리되고 그 것이 이내 점점 희미하게 합쳐져 가는 모습을 여러 개의 화려한 무대로 연출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들 만큼  무대 연출은 계산적이면서도 탁월했어.

이렇게 자세히 말해도 되나 싶지만, 과감하게도 나는 그 물음에 YES라고 대답하고 싶어. 이 작품은 관심을 가지고 보면 볼 수록 아름답고, 기대를 가지고 보면 볼 수록 내가 고정된 사고에 빠져 있었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에 쌓이게 해주지. 

관심이 없었어도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많이 많이 기존의 뮤지컬만큼이나 기대를 많이 가지고 봤으면 하는 바람이야. 

가격도 중극장인만큼 다른 뮤지컬에 비해서는 싸고, 출판사에 관계 없이 '키다리 아저씨' 단행본을 가지고 간다면 할인 또한 받을 수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이 여름, 편지와도 같은 기대와는 전혀 다르지만 아름다운 뮤지컬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추천한다네.


아, 내가 본 공연에는 신성록씨와 이지숙씨가 열연해주었는데, 내가 연기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만큼은 기대와 다르지 않고 넘칠만큼 충분하고 개성넘친다고 생각하네. 

오로지 둘이서 무대를 장악하고 작품에 녹아들고 관객을 끌어들여 교감하는 일은 수많은 장치와 수십의 배우들을 가지고 하는 것과는 또 다르게 너무나도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배우들은 정말로 귀엽고, 아름답고, 농익은 매력을 오롯이 관객들에게 전달했어. 다시 한 번 이 자리에서 배우들에게 찬사를 표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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