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꽤 대단했었지’. 앨범명으로 이렇게 구체적으로 쓸쓸한 이름이 있을까? 앨범 아트 또한 그렇다. 내야만 하니까 어떻게 없는 힘 짜내서 우그러든 하얀 비닐코팅지 위에 매직으로 트랙이름만 써 두었다. 트랙에 희망적인 구석은 찾아보려 해도 찾아 볼 수가 없다. 트랙들의 제목만으로도 느낄 수 있다. 그저 더 이상 곡을 쓰기도 힘든 이들의 마지막 숨길 같은 곡들이 11곡 오롯이 담겨있다. 담담히 ‘우리 마지막 앨범입니다’라고 말해도 납득할만큼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 힘들다’ 는 독백을 들려주는 이 앨범은 에픽하이의 11집이다.
10년이 넘었고, 정규로만 11집. 그들의 달려온 자리는 수많은 명곡으로 가득 담겨 있다. 음악색은 10년간 변화하고 정립되고 ‘에픽하이’라는 이름이 곧 그들의 음악이 된 뮤지션. 참 살기 팍팍하고 짜증나는 걸 직설적으로, 어떤 때는 감성적으로, 어떤 때는 희망차게 노래하던 이들이다. 그게 타블로, 투컷, 미쓰라라는 셋이 만들어내는 화음이었다. 물론 언제나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노래하지는 못했다. ‘타진요’로 대표되는 유명인에게 찾아오는 스캔들이라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마녀사냥. 너무 뛰어난 멤버로 인한 창의성의 벽, 사회의 니즈 사이에서의 갈등. 수많은 일이 있었고, 그럼에도 10집 ‘신발장’으로 보여주듯 툭툭 털고 현관을 나선 듯 보였다. 적어도 그들은 사회가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했던 것 같다. 그러면 다시 예전처럼 노래할 수 있을까 생각했나 싶다.
익은 걸 썩은 취급하는 이 시대에 뭘 바래, 고개 숙인 벼는 베이기만 해, 숨을 쉴 수가 없어. 난 사람이 제일 무서워.
- <난 사람이 제일 무서워>
그러나 어쩌면 그 ‘예전 같은 음악을 하자’라는 마음이 걸림돌이 되었을까. 무던히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던 외로운 싸움들이 트랙에서 계속된다. ‘난 사람이 제일 무서워’로 볼 수 있는 그들의 대중에 대한 회의감, 압박감, 공포는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이 가장 괜찮았던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가장 대표적인 서정적 스타일의 곡도 써보고(연애소설), 그들이 다시 ‘에픽하이’가 되었다는 평도 들은 그들의 스웨그가 담긴 단체곡도 써봤다. (노땡큐)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려 할 때마다 역설적으로 지금의 모습은 텅 비게 됐다. 더 이상 그건 새로운 것도, 과거의 것도 아니었다. 사진첩을 뒤적이는 것일 뿐. (빈차-here come the regrets-상실의 순기능)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있는 위치가 아니게 된 것이다. 10년전의 에픽하이는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에서 ‘언젠가 대단했던 그 때’를 따라 창작하기에는 사회도, 그들의 입지도, 그들의 삶도 많이 바뀌었다. 그들은 이제 20보다 40이 가까운 나이가 되었으니. (BLEED) 마침내 그들은 과거를 향하기를 포기했다. (TAPE 2002~) 여전히 과거의 아름다움에서 눈을 떼긴 힘들지만, 그것이 현재가 아니기에 과거부터 현재를 같이 한 이들에게(어른 즈음에), 그리고 그의 과거와 현재를 담고 미래로 향할 딸에게(개화), 더 이상 자신들이 가장 대단하지 않은 세상에(문배동 단골집) 눈을 돌린다. 그 감정이 아련하고, 괴롭고, 씁쓸하더라도 그 감정과, 그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영원한 건 없기에 언젠가는 나 역시 무심한 세월에 저편에서 서서히 먼지 덮여 가겠지.
- <문배동 단골집>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들은 과거 같은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테이프는 2002년에 멈춰 있지 않다. 오늘은 멈추려 해도 또 하루를 더 가 내일이라는 트랙을 튼다. 회한도 가득하고, 여전히 세상은 무섭고, 부담감의 연속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쫓을 수 없는 과거를 향하는 동안 더 대단하지 않게 되니까. 어쩌면 이 결론에 도달하고 그들은 지금껏 만든 것을 갈아엎고 새로 만들까 고민했을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새로운, 대단한 음악을 하기 위해.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앨범을 만들면서 고민하던 그 행적을 오롯이 다듬어 담았다. 그렇게 그들의 역사상 가장 우울하고 침체된 앨범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아름다운 명반이 탄생했다.
그들이 완전히 과거로 회귀했다면, 아예 갈아엎었다면, 저 후회에 대한 답을 내리기라도 했다면 여전히 좋은 음악이었겠지만, 그들의 ‘서사적인 높음’은 사라졌을 것이다. 사람의 삶과 그 가운데 고민이야 말로 가장 서사적이고, 그들의 고민이 우리의 회한에 가득차 몸부림치는 오늘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서사로 다가온다. 가장 대단했던 시기로 돌아가는 것도, 새로운 대단함을 만드는 것도 아닌 그 ‘보통의, 후회의 서사’가 가장 ‘에픽하이 다운’ 대단함이 되었다.
‘FLY’도 ‘ONE’도, ‘우산’도 거리에서 흘러나오지 않지만, 그들의 내일이 없는 듯한 한숨은 지하철에서 한숨짓는 이들의 한숨과 함께 오늘도 흐른다
깜빡거리는 신호등 굴러다니는 낙엽도 할 일 하는데 난 왜 이럴까
-<상실의 순기능>
가슴 한 켠에 계속해서 요동치는 ‘왜 사는 걸까’, ‘뭔가 해야 할 것이 있었는데’ 같은 생각의 찬바람이 도는 계절이다. 한 해가 다시 가버렸고 한 살을 먹는다. 이룬 것도 없이 또다시 나이를 먹는다. 예전의 꿈이 있었던 시절이 그립고는 한 11월이다. 이런 헤어나올 수 없는 찬 바람을 같이 맞아주는 쌀쌀하고 씁쓸한 에픽하이의 11집은 되려 따뜻한 말보다 위로가 된다. 숨기지도, 뒤엎지도 않고 낸 투박한 그들의 앨범은 지하철에 앉아 한숨 쉬는 오늘도 당신의 하나뿐인 앨범임을 직접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일까.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런 오늘을 모아둔 당신의 가을이 에픽하이의 11집처럼 아름다움을 그들의 목소리로 확인했으면 좋겠다.
날 위해 잠시 멈춰주면 안될까요. 더는 걷기가 힘든데, 바람이 불고 아직도.
- <빈차>